[오늘의 추천시글] ‘내 새끼 지상주의’와 온 마을

 

‘내 새끼 지상주의’와 온 마을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지금 한국 사회는 인류의 생태적 성공 뒤에 놓인 공동 육아라는 비법을 다시 성찰해야 할 때다

 

치열한 경쟁과 물질주의에 중독되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출산과 양육마저도 각자도생의 영역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내 새끼만 소중한 게 아니란 자각과 내 힘만으로 내 새끼를 온전히 키울 수 없다는 고백이 인류를 독특한 자리로 진화시켰음을 상기할 때다

 

소설가 김훈이 통렬하게 꺼낸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말이 공명을 멈추지 않는다. 최근 새내기 여교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육아 원리를 그는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라고 일갈했다(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관한 언급과 그로 인한 논란은 이 예리한 문제 제기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에 적당히 숨어 있는 “지위 높은 선생님들”을 비판했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우리가 어쩌다 이런 ‘낯선’ 육아 원리를 갖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오늘의 추천시글] ‘내 새끼 지상주의’와 온 마을

 

불과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학교와 학원에 직접 데려다 주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해가 지도록 친구들과 어딘가에서 뛰놀다 겨우 들어왔다. 부모가 집에 없어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뭔가를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내 자식의 친구들이면 내 자식처럼 불러서 밥을 먹였다. 작금의 젊은 부모들의 눈으로 보면, 그때의 부모들은 자녀를 방치한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현재로 와보자. 친구들과 등교하다가 납치범에게 유괴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자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등교해주지 않는 부모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어른이다. 학원에 직접 운전을 해서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오지 않는 부모는 나쁜 부모이다. 영어나 수학 캠프에 아이를 보내지 않는 부모는 무관심한 부모이며, 해외여행을 계획하지 않는 부모는 무능한 부모이다.

 

반세기 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요로워졌으니 부모 의무사항이 많아진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여유로워진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풍요로움으로의 변환 과정에서 ‘내 새끼’만 더 소중해졌다는 사실이다. 남의 새끼는 내 새끼의 경쟁자이며 우리 자녀들은 내 새끼와 무관하다는 ‘낯선’ 의식이 스르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요즘 교사들은 학부모가 자녀의 가방에 녹음 장치를 몰래 넣고 등교시킬 수 있음을 인지하라고 서로를 긴장시킨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는 반을 맡은 해(사실상 매년)에는, 해당 학부모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학부모들로부터 엄청난 민원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한숨 짓는다. 방심했다가는 학부모로부터 고소도 당할 수 있으니, 교육에 대한 소신과 철학은 묻어두고 몸을 최대한 사려야 한다고들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신 있게 교육에 헌신해온 베테랑 교사들은 굴욕감 때문에 정든 학교를 떠나고 새내기 교사들은 겁에 질려 있다.

 

학교, 학부모·학생 민원실로 변질

옛날에는 자원과 여력이 부족한 부모들이 대부분이어서 학부모는 교사의 인격과 전문성을 믿고 교사의 육아 원칙에 보조를 맞춰가는 게 보편적이었다. 소수의 부유한 부모가 학교와 교사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하지만 불과 몇 십년 후인 현재 학교를 보라. 자기 새끼의 앞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네가 뭔데 내 새끼에게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말할 태세인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 이제 학교는 어린 학생들의 인성과 실력을 길러주는 교실이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의 민원을 처리하는 사무실로 변질되고 있다.

 

혹자는 그동안 학교와 교사가 갑질을 해왔는데 이제야 학생과 학부모의 권한이 커져 학생, 학부모, 교사, 학교가 권력의 균형을 갖게 된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는 권력다툼으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여의도가 아니다. ‘온 마을이 필요한’ 우리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주체의 갑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능력이 닿는 한 내 새끼를 최고로 잘 키우겠다는 부모의 열망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부모가 자녀 교육의 모든 것을 챙겨야 하고, 그에 관한 수많은 행동지침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죄책감과 열패감을 느끼는 사회라면, 그 구조가 ‘내 새끼 지상주의’를 만들어내는 동력이다. 그래서 어쩌면 갑질 학부모도 과열된 경쟁 사회의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젊은 부부는 애 낳기를 미루거나 포기한다. 어찌하여 애를 낳아 기르는 부모는 ‘내 새끼 지상주의’와는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지만 딱히 대안이 없어 보인다. 내 새끼를 성공작으로 만들려면, 물려받은 게 많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우리 모두가 마치 내 새끼 육아 올림픽 같은 걸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애를 키우는 것이 정말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진화가 이렇게 힘든 일을 자연스러움으로 포장할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감사의 마음'이 가져오는 치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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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마음'이 가져오는 치유의 힘

이병욱 박사(대암클리닉 원장) 조금 더 살고 싶은 사람에게 마지막을 생각하고 죽음을 바라보라는 말은 참 야박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살아온 삶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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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의 양육 행동을 연구해온 학자들에 따르면, 사피엔스는 유인원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양육 스타일을 진화시켰다. 일단 인간은 모든 유인원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크고 천천히 자라며 키우면서 가장 큰 비용을 들여야 하는 아기를 낳는 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출산 간격이 가장 짧다. 보통 이런 경우는 출산 간격이 길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끼를 낳고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이 클수록 어미는 다음 출산 때까지 더 오랜 기간을 회복하는 데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 아기들보다 덜 무력하게 태어나고, 더 빠르게 성장하며, 훨씬 더 빨리 자립하는 고릴라·침팬지·오랑우탄의 경우 출산 간격은 평균적으로 6~8년 정도이다. 반면 인간의 경우 수렵 채집민 어머니들은 대략 3~4년 간격으로 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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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기 포기하거나 내 새끼 집착

가장 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양육비를 지출해야 하는 종이 다른 유인원 종들에 비해 출산 간격이 2배나 빠르다는 사실은 추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협동 번식’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영장류학자 허디에 따르면, “이러한 엄청난 번식력은 조상 집단에서 어머니가 대행 부모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협동 번식’은 대행 부모가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부양하는 행위를 뜻하고, ‘대행 부모’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손위 형제자매, 이모, 이모할머니, 아버지, 삼촌, 심지어 이웃 집단에서 온 방문객 등 여성의 출산과 자식의 생존 가능성을 돕는 존재를 지칭한다. 허디에 따르면, 10만년 전만 해도 지구를 구석구석 훑어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사피엔스가 지구를 뒤엎을 만큼 드라마틱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협동 번식의 진화이다.

 

 

 

협동 번식, 쉽게 말해 공동 육아는 먼저 낳은 자식이 자립도 하기 전에 어머니가 또 다른 자식을 낳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피엔스의 어머니들은 집단의 다른 동료들의 공동 보살핌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무력한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키울 수 있었고, 그래서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었다. 아기 입장에서도 새로운 도전이 펼쳐졌다.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와 대행 부모들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했고, 관심과 도움을 끌어낼 수 있어야 했다. 어머니의 가슴팍에만 안겼던 아기는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 대행 부모의 보살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존한 아기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니 무력한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보호자를 부르고 머물게 하는 ‘응애’(사회성의 원초적 형태)였다.

 

킬러 문항은 대학에로

인간의 공동 육아 방식의 독특성에 대한 증거들은 야생에 널려 있다. 야생 침팬지 어미가 새끼를 손에서 기꺼이 놓아주는 시기는 생후 3개월 반이 지나고 나서부터다. 야생 오랑우탄은 생후 반년이나 지나야 한다. 반면 인간 어머니는 출산 직후부터 다른 사람들이 갓난아기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한다. 실제로 !쿵족의 수렵 채집민 어머니들은 출산 후 다른 사람들이 아기를 안아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아기들은 늘 누군가에게 안겨 있지만 그 누군가가 꼭 어머니인 것은 아니다. !쿵족 유아가 대행 부모에게 안겨 있는 시간은 대략 25%나 된다. 인간 어머니도 자식의 안전에 대한 경계심은 많지만 다른 유인원 어미가 보여주는 새끼에 관한 소유욕은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무력한 갓난아기를 낳아 안아본 어머니는 더 많은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다. 허디는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서 이런 깨달음이 인류의 진화 경로를 더 협력적인 방향으로 바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인류의 생태적 성공 뒤에 놓인 공동 육아라는 비법을 다시 성찰해야 할 때다. 치열한 경쟁과 물질주의에 중독되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출산과 양육마저도 각자도생의 영역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지난 10만년 동안 재생산의 지지대가 되어주었던 공동 육아가 사라졌고, 그만큼의 사회적 지원과 안전망이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젊은 부부들은 아이 낳기를 포기하거나 자기 자녀에게만 집착하게 되었다. 내 새끼만 소중한 게 아니라는 자각과 내 힘만으로 내 새끼를 온전히 키울 수 없다는 고백이 인류를 독특한 자리로 진화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이다.

 

[오늘의 추천시글] ‘내 새끼 지상주의’와 온 마을

 

장대익

진화학자이며 과학철학자. 인간 본성과 기술의 진화를 연결시키는 연구와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과학과 인문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 기술, 사회의 진화를 이야기해왔다.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윈의 식탁> <다윈의 정원> <울트라 소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종의 기원> <통섭>(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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