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가 마구 넘실대는데, 대통령 마저? [고영회]

 


외국어가 마구 넘실대는데, 대통령 마저?
2022.07.05

최근 기사에서, 노룩 악수, 도어 스테핑,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 베이비 스텝, 빅 스텝, 자이언트 스텝...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외국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노룩 악수>
어, 악수할 때 누룩이 왜 나오는 것이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수할 때 상대방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 손을 잡는 것을 말하나 봅니다. 기자는 기사를 쓸 때, 외국인이 노룩노룩거린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써야 어울릴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원어를 그대로 가져와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를 외면한 채 악수하다, ‘외면 악수’ 이런 정도로 쓰면 쉽게 알아듣습니다. 더는 누룩을 불러오지 마소서.

<도어스테핑>
이 말도 참 생뚱스럽습니다. 사전에 도아스텝은 명사로 문간(의 계단)을 말한다고 설명이 나옵니다. 그 말에 현재 분사형 어미를 붙였는데 우리에게 올바른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문간에서 잠깐 얘기를 나누는 뜻인가 봅니다. 이런 말을 우리 독자에게 그냥 써는 기자의 머리 속이 궁금합니다. 출근길 대화, 짧은 문답 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원어가 가진 맛이 나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그 기자는 영어신문 기자로 방향을 틀어야겠지요!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와 국립추모공원>
윤 대통령이 "(반환되는 용산공원을)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는 말이 우리나라 사람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하죠. 영어권에서는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합니다. 외국어가 멋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 무엇보다 헌법과 법률을 지켜서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국어기본법에 어긋납니다. 국어기본법은 ‘국어로써 국민의 창조적 사고력을 증진하고, 그 바탕인 국어는 문화발전의 원동력이고, 국어를 발전시켜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나 추모공원이나 모두 외국어이니, 어느 쪽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헛소리를 하더군요. 그런데 저 말이 정말로 대통령 입에서 나왔나요?

 

 



<베이비 스텝, 빅 스텝, 자이언트 스텝>
무슨 걸음걸이 대회를 하는 듯합니다. 이런 말 아십니까? 무슨 말인가 찾아보니 기준 금리를 조정하는데, 0.25%는 베이비 스텝, 0.5%는 빅 스텝, 0.75%는 자이언트 스텝이라고 하나 봅니다. 몇 년 전 처음 베이비 스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기가 뒤뚱거리고 걸으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아찔합니다. 아기 걸음, 어른 걸음, 거인 걸음 이런 식으로 직역하여 써도 될 것 같고, 소폭 중폭 대폭으로 쓰면 무방하겠습니다. 저런 말을 버젓이 기사 큰 제목으로 올리는 기자는 누구였나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꼴찌 수준으로 못 살다가 오늘날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10번째라 합니다. 우리 뒤에 러시아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이 있으니 대단한 위치입니다. 이렇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바탕이 뭘까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나는 우리말 우리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 기술을 들여와 제품을 생산하려면 기술서(영어로는 스페시피케이션, 줄여서 스펙이고 우리말로는 일본에서 온 말이겠지만 시방서입니다. 스펙이 시방서보다 더 멋진가요? 어느 쪽이 더 알기 쉬운가요?)를 알기 쉽게 써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생산기술을 잘 알아야 제품을 제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기술서를 우리글로 번역하여 주면 일하는 사람이 쉽게 알고 제대로 일합니다. 기술을 쉽게 익힙니다. 생산기술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말글을 썼기에 재빨리 익혀 생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경제 강국으로 컸습니다.

말글은 사람끼리 소통하는 수단입니다. 말글 자체는 특별한 때 말고는 예술이나 멋짐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말글이 어지러워서 제대로 소통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해악이 됩니다. 말글이 잘 통해야 집단 지성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사람에게 잘 통하도록 쉬운 우리 말글을 쓰자는 것, 이게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말글살이에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듭시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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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고영회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고(1977), 서울대 건축학과(1981)와 박사과정을 수료(2003)했으며, 변리사와 기술사 자격(건축시공, 건축기계설비)가 있습니다.
대한변리사회 회장, 대한기술사회 회장, 과실연 공동대표, 서울중앙지법 민사조정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서울중앙지검 형사조정위원과 검찰시민위원,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법원 감정인입니다. 현재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와 ㈜성건엔지니어링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mymail@patinf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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