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을 먹으면서 [임철순]
수박을 먹으면서
2022.06.30
어느 날 헬스센터 러닝 머신 위에서 걷고 있는데, 욕하는 것 같은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런 가사였습니다. “생선을 먹을 땐 가시 발라먹어/수박을 먹을 때는 씨 발라먹어/날 좋아하는 분들 내 사랑 먹어/욕하고 모욕하고 그랬다 카더라 카는 분들 모여 이거나 먹어.”
2017년 싸이가 내놓은 ‘I LUV IT’이라는 노래입니다. “수박을 먹을 때는 씨 발라먹어”라는 대목이 욕을 연상시켜 KBS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발라 먹든 파고 먹든 욕처럼 들리는 수박씨에는 영양이 풍부하다는데, 소주잔 반 잔 분량에 하루 권장 섭취량의 30%쯤 되는 마그네슘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또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인 리놀레산과 항산화물질 라이코펜이 풍부해 암이나 관상동맥질환을 예방하고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다는군요.
하지만 수박 먹을 때 씨까지 삼킨다고 이런 영양분이 섭취되는 건 아니며 껌처럼 그대로 배설된답니다.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려면 가공을 해야 하는데, 올리브유와 소금을 뿌리고 볶아서 샐러드나 요거트, 오트밀 등에 뿌려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가신 짓을 누가 하겠어요? 대충 뱉어버리고 말지.
어쨌든 이 장마와 폭염에 수박을 보면 어떻게 즐겁게 나눠 먹을까 궁리를 해도 시원찮은데, 사람들은 왜 “너는 수박이다, 아니다” 그러면서 싸우는지, 고마운 수박에게 창피하지도 않은가 싶습니다.
‘수박싸움'은 더불어민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쟁투입니다. 2년 전 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정부 실책을 비판하자 일부 민주당원들이 그들을 국민의힘 스파이라는 뜻에서 겉은 파랗고 속이 빨간 '수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 뒤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낙연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비판하자 친이재명·반이낙연 측이 본격적으로 '수박'을 욕하고 나섰습니다.
‘수박’은 이제 이재명 의원을 지지하지 않는 이낙연 전 대표의 측근 등 친문(친 문재인)계 정치인을 비난할 때 쓰는 표현이 됐습니다. 이 의원 지지자들은 그를 반대하는 당내 인사들을 ‘수박’,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만 이 의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똥파리’라고 부르면서 “수박과 똥파리는 당을 떠나라”고 공격합니다. ‘똥밀필패’는 똥파리가 지지하면 반드시 진다는 뜻이랍니다.
당내가 시끄러워지자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이 ‘수박’이라는 단어를 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서 그런지 요즘은 좀 잠잠해졌지만 이 싸움은 참 저질입니다. 이상민 의원의 지적대로 국회의원들의 말치고는 정말 내용이 ‘쪼잔하고 찌질’했지요. 천박하기야 ‘개딸(개혁의 딸)’이니 ‘냥아’나 ‘양아들(양심의 아들)’이니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들이 싸우거나 말거나 관심 둘 일도 아니지만 수박 먹을 때면 그 사람들 싸우는 게 생각나 성가십니다. 마크 트웨인이 말하기를 “수박은 세상 모든 사치품의 으뜸이며, 한번 맛을 보면 천사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지요? 그렇게 거룩한 수박을 가지고...
수박 먹는 즐거움을 생각해봅니다. 중국 명말 청초의 재사 김성탄(金聖嘆·1608~1661)의 글 ‘불역쾌재(不亦快哉,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는 “여름날 주홍색 소반 가운데 짙푸른 수박을 올려놓고 쾌도를 빼어 쓱쓱 자르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소반은 주홍색인데 짙푸른 수박을 가르니 짙붉은 속살이 드러나는 시원한 광경! 생각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입니다.
우리 선인들 가운데서는 이색(李穡, 1328~1396)과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수박 시가 볼 만합니다. 이색은 “하얀 속살은 얼음처럼 시원하고/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구려/달고 시원한 물이 폐에 스며드니/신세가 절로 맑고도 서늘하구나”[瓣白氷爲質 皮靑玉有光 甘泉流入肺 身世自淸涼]라고 했습니다. 이 수박은 빨간색이 아니라 속이 흰 것이었나 봅니다.
병중에 지은 서거정의 수박 시를 중요한 대목만 추리면 이렇습니다. “큰 칼로 썩 쪼개니 모양은 흡사 반달 같고/칼끝에선 붉은 눈발이 어지러이 떨어지네/벌꿀보다 더 달고 찬물보다 더 맑아라/금귤 따위는 수박에 견주면 노비 꼴이구려/늙은이가 소갈병으로 창자가 끓는 지경에/ 한 번 씹으니 어찌 입이 즐겁지 않을손가/갑자기 내 고질병까지 다 낫게 해 주어/백일청천에 신선 되어 오른 기분일세.”[長刀快割如半月 隨刀紛紛落紅雪 甛於崖蜜淡於水 金橘是奴馬乳婢 老夫病渴腸欲熱 一嚼胡爲不口悅 忽然使我沈痾痊 白日換骨思神仙]
소갈병은 당뇨를 말합니다. 수박을 노래한 시에는 이 소갈병을 앓았던 중국 전한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가 단골로 등장합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도 “갈증이 나서 수박을 씹어 먹으니/묵은 질병이 갑자기 나아 버리네”[患渴嚼西瓜 沈綿忽已蘇]라고 했더군요. 그래서 나도 수박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수박 한 통을 길러내는 데는 보통 3개월가량이 걸리며 5~6월에 한 차례, 7~8월에 한 차례 수확한답니다. 사 먹는 사람들은 요즘 수박 값이 너무 올라 불평이 많지만, 생산 농가들은 품이 많이 들고 인부 사기도 힘든데 각종 물가가 다 올라 수지 맞추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게 귀하고 좋은 과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나눠 먹기는커녕 남들 욕하는 데 이용하는 사람들은 참 딱하고 못된 자들입니다. 야당 내부는 물론 여와 야, 여당 내부의 싸움도 어찌나 유치하고 저질스럽고 천박한지 수박씨를 꼭꼭 씹어 먹으려다가도 홱 뱉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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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데일리임팩트 주필,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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