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극복한 사랑의 힘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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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극복한 사랑의 힘
2022.06.24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이 깃든 행성 지구,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구슬처럼 아름다운 푸른색 별이라고 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인간이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맸어도 지금까지 생명을 품은 다른 별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구가 늘 생의 환희가 넘치는 별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한때 같은 나라였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참혹한 전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그 바람에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이 목숨을 잃고, 온 세계가 식량난 에너지난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28년 전에는 아프리카 대륙 한복판의 작은 내륙국가 르완다에서 끔찍한 종족 간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석 달여 만에 80여 만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었습니다.
르완다는 우리나라 경상북도에 제주도를 합친 것보다 조금 작은 면적(26,338㎢)에 약 1,300만 명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종족 구성은 후투족(Hutu) 84%, 투치족(Tutsi) 15%, 트와족(Twa) 1%.
르완다의 비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래전 그 땅에는 후투족, 반투족, 트와족 등이 어울려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보다 한참 늦게 북쪽에서 에티오피아계의 키 큰 투치족이 들어오며 최초의 왕국을 건설하고 지배계급이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던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하며 통치권을 벨기에가 넘겨받았습니다. 벨기에는 과거 지배세력이던 소수 투치족 편을 들어 후투족과의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1962년 독립 이후 카이반다(Kayibanda)에 이어 쿠데타로 집권한 후투족 대통령 하뱌리마나(Habyarimana)는 20년간 장기집권하며 투치족을 억압했습니다. 그렇게 지배세력이 바뀔 때마다 적잖은 소동과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1987년에는 국외로 도피했던 투치족 일부가 반군(RPF; 르완다애국전선)을 조직, 정부군과 싸우다가 1993년 8월 양측 합의로 다시 국내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대통령 전용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되어 하뱌리마나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흥분한 후투족 강경파들이 사건 배후로 투치족을 지목했고, 또다시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투치족을 무차별 살육했습니다. 100여 일 동안의 소요에서 투치족과 그들에 우호적이던 후투족 온건파 8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습니다.
무샤카 마을의 투치족 여인 버나뎃도 그 난리 통에 남편(카베라)을 잃었습니다. 아들 알프레드가 겨우 열네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건 직후 같은 마을에 살던 아홉 살 소녀 얀커리제는 아버지(그라티앙)가 후투족의 집단행동에 휩쓸려 카베라의 학살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얀커리제는 곧바로 버나뎃을 찾아가 집안일도 돕고 농사일도 도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죄를 지었으니 나라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들(알프레드)을 기숙학교에 보내고 농사일이 너무 벅찼던 버나뎃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끔찍했던 학살 소동은 그해 7월 폴 카가메가 이끄는 투치족 RPF가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카가메는 후투족 온건파 비지뭉구를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부통령 겸 국방장관으로 혼란을 수습했습니다.
학살범으로 10년 동안 구금되어 있던 얀커리제의 아버지 그라티앙은 2004년 법정에서 버나뎃에게 그녀의 남편 카베라를 자신이 살해했노라고 자백하고 사과했습니다. 버나뎃과 아들 알프레드는 그라티앙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라티앙의 딸 얀커리제에 대한 버나뎃의 감동, 그리고 알프레드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정성껏 도와주는 얀커리제를 지켜보며 알프레드는 언제부턴가 사랑의 싹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버나뎃, 알프레드 모자의 용서에 힘입어 그라티앙은 장기 징역형 대신 2년간의 지역사회봉사 판결을 받았습니다.
딸 얀커리제와 알프레드의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더 놀란 쪽은 그라티앙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원수인 자신의 딸과 혼인을 맺으려 하는지 그라티앙은 얀커리제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버나뎃이 자신의 딸에게 전혀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그라티앙은 둘의 결혼을 축복해주었습니다.
버나뎃은 “사돈이 저지른 일과 관련해 며느리에겐 어떤 분노도 일지 않았다. 그 아이는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고의 며느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망설이는 아들을 결혼하도록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둘은 2008년 마을 가톨릭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라티앙이 사회봉사형을 마친 뒤 자신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용서를 기도했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올봄 무샤카 마을에서는 대학살 28주기 추념행사가 열렸습니다. 학살에 가담했던 그라티앙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가족들이 두 종족 간의 화해와 공존의 방식을 가르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버나뎃 가족 이야기는 르완다 사회의 화해를 위해 힘쓰는 종교단체에 의해 이웃마을로, 나라 안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외신을 통해 나라 밖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얀커리제와 알프레드의 사랑이 르완다의 갈등과 비극을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나 비극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더없이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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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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