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2 [김창식]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2
2022.05.31

지난달 23일자 칼럼 ‘4월의 시(詩)’에서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다루었습니다. ‘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사는 4·19 세대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한 투철한 참여 의식을 갖고 있던 세대가 나이가 들며 현실에 길들어 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군요.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순수와 열정,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참여의지를 갖고 있던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그토록 타기(唾棄)하던 현실에 수용되는 모습은 슬픈 자화상이었거든요. 그냥 그런가 보다 ‘살기 위해 근근이 사는’ 요즘도 간혹 이 시를 떠올리곤 합니다. ‘어어’ 하는 사이 노년의 중턱에 들어서서 매사가 심드렁한 나와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마찬가지로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군요.

시의 제목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멕시코 출신의 트리오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Los Tres Diamantes)가 부른 <루나 예나(Luna Llena·滿月)>에서 따온 것입니다. 애조 띤 휘파람과 허밍이 인상적인 이 노래는 푸른 달빛 아래 기억의 편린으로 남은 옛 연인을 회상하는 몽환적인 노래지요. 우리나라에선 남성 4중창단 블루벨스와 정시스터스가 부르기도 한 유서 깊은 노래예요. ‘세 개의 다이아몬드’를 뜻하는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의 다른 히트곡으로는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말라게냐(Malaguena)>가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1960년대는 라틴 음악의 전성시대이기도 했지요. 라틴 음악 하면 떠오르는 전설 3인방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Los Indios Tabajaras), 트리오 로스 판초스(Trio Los Panchos)입니다. 브라질 출신의 기타 듀오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 최대의 히트곡은 기타 연주곡 <마리아 엘레나(Maria Elena)>입니다. 트리오 로스 판초스는 라틴 계열이지만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트리오였어요. 히트곡으로는 <라 팔로마(La Paloma·비둘기)>, 우리 가수 조영남이 불러 한층 더 유명해진 <라 골론드리나(La Golondrina·제비)>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노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헤어진 옛 연인의 흔적을 더듬으며 감상에 젖는 애가(哀歌)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끔은 매일 매일 함께 지내며 늘 보는 얼굴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어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내게 5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랍니다. 바람이 일 때마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차르르르 초록 물고기 떼처럼 반짝였던 그해 5월 그날 한 여자를 처음 만났거든요. 회사 통근버스 안에서였고, 지금은 아내로 있는 여자를 말입니다.

출발지에 가까운 정류장인지라 버스에 오르니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굳이 그녀 옆자리에 비집고 앉는 것이 멋쩍었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앉았죠. 그녀는 긴 머리에 항상 고개를 숙여 책을 읽고 있는 단아한 모습이었답니다. 매끄럽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그날은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더군요. 힐끗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옆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을 읽고 있어요. 에세이나 교양서적일 터인데 책을 읽는 모습이 웬일로 안쓰러워 보이더군요.

나는 무슨 이야기로 말을 걸까 궁리했죠. "무슨 책이에요?" 아니면 "어느 부서에 근무하세요?" 자연스럽긴 하지만 너무 스테레오타입이잖아. 그럴듯하면서도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 거리가 없을까.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유머와 에스프리가 담긴… 어찌어찌 말을 걸어 통성명을 했고, 남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그해 11월 결혼을 했습니다. 부대끼며 함께 지낸 지 어언 40여 년이 되었군요.

 

 


아내는, 세상의 모든 아내가 그럴 법도 하지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안 아픈 데가 없다면서도 도통 쉬는 법이 없고 일을 만들어서 합니다. 그러다 보면 피곤도 하겠지요. 어떤 때는 나보다 먼저 잠들기도 합니다. 흐릿한 조명 아래 사이사이 주름이 잡힌 아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습니다. 청바지를 ‘줄여' 입던 스물네 살 긴 머리 '처녀’의 얼굴을.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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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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