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지우기 [오마리]
그리움 지우기
2022.05.25
이녹크 아덴을 들어보신 분이 많으시겠지요.
갑자기 이녹크 아덴을 왜 언급하냐고요? 소녀 시절에 읽었던 한 권의 책이 칠순이 되도록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800년대의 영국 작가,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의 동화 같은 서사시의 주인공이며 책 제목입니다.
내용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외딴 바닷가에 살고 있던 세 아이들이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사랑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녹크와 애니가 자라서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이노크는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소식이 끊깁니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간신히 귀향한 이노크 앞에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애니를 짝사랑했던 친구 필립이 이노크를 기다리다 지친 애니와 재혼하여 이노크의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 애니가 친구 필립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이노크는 발길을 돌립니다. 그런 모습을 창 밖에서 들여다보는 그의 심정, 결국 쓸쓸히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비탄과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그의 사랑과 깊은 슬픔이 절절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남프랑스 지중해변을 달리는 기차를 탈 때마다 항상 마르세유의 생 샤를 기차역을 지나치거나 그 역에서 엑상 프로방스로 , 칸 니스로 혹은 이탈리아 국경을 경유하여 이탈리아 제노바 행 기차를 갈아타고는 했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마르세유 기차역 생 샤를에 서면 이녹크 아덴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나는 왜 테니슨의 책 속에서 그리는 바닷가는 영국인데도 프랑스 항구 도시라고 생각했었던지, 거친 항구도시 마르세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아마 그 당시 불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탓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자라서 마르세유에 들러봐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정작 마르세유에 발도 딛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였습니다.
마르세유에 가야지 하면서도 그곳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던 이유는 오랫동안 마르세유가 범죄도시로 오명을 쓰고 있었던 탓인데 특히 나처럼 솔로 여행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금년 봄의 여행이 마지막 여행일 것 같고 또 오랜세월 묻혀 있던 이녹크에 대한 연민과 그 항구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 마르세유로 떠났습니다.
마르세유는 남프랑스의 관문이며 프랑스의 3대 도시로 기원전에 역사가 시작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마르세유 생 샤를 역에서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 유럽, 칸 니스를 거쳐 로마 혹은 밀라노까지 기차여행이 가능합니다. 프랑스의 자부심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 아비뇽, 생 레미 행 버스가 자주 있습니다. 중세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수십 년 전의 이 역은 초라하고 불편한 역사였는데 이젠 현대적이고 매우 편리하며 깨끗하게 건축되어 인상이 좋았습니다. 물론 거리는 내가 다녀본 유럽의 인기 있는 도시들에 비하여 열악한 부분도 있고 멋진 광장이어야만 할 곳이 별로였거나, 요트 보트들과 레스토랑이 즐비한 올드포트(OLD PORT)라고 불리는 부두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솔직히 유럽의 인기 있는 아름다운 도시들에 비하여 여러모로 부족했지요. 그런데 여기도 빈부의 격차는 극심해 보였
습니다. 치안이 괜찮은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해안가는 여유있게 사는 사람들의 주택이나 맛도 좋고 경치도 좋은 레스토랑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8박을 하면서 느낀 것 중에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점은 이제 이 도시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범죄율이 높은 악명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시내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우선 지중해 앞 부둣가 페리의 선착장 바로 옆에 현대적인 아름다운 빌딩이 들어선 것입니다. 항구의 테라스(LES TERRASSES DUPORT)라는 멋진 쇼핑센터 몰입니다. 나는 이 몰을 톡톡히 즐겼습니다. 우선 아이폰이 고장나서 애플 스토어에 가서 고쳤고 (애플 스토어는 유리창 전체가 지중해 바다로 향해 경치가 대단했음), 건너편의 아름다운 고건축물과 마주하고 있는 3층의 스타벅스 커피 한잔은 호사로웠습니다. 통유리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이 컸으니까요. 지하층엔 프랑스에서는 알려진 수퍼마켓이 있어 그 또한 편리했습니다. 이렇게 구건축과 현대 건축이 매우 조화롭게 마주 보는 구조에 다시 한 번 프랑스인들의 미적 감각과 저력에 놀랐던 것입니다. 이제 LES TERRASSES DUPORT는 이 도시의 명물이 되어 많은 관광객에게 친근함과 편리함 그리고 자부심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방치와 무관심은 자신들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를 망가뜨리게 되며 결국 그 도시는 빈민촌으로 전락하여 소멸의 끝을 보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역사적 가치가 큰 지중해변의 이 아름다운 해양도시가 오명과 두려움의 도시로 전락했던 이유는 그 도시를 경영했던 관리나 정치인들에게 큰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광주 광역시에 그곳의 장년층이나 청소년들이 즐길 수 있는 쇼핑 몰이 없어 인근의 대전 혹은 대구로 쇼핑 겸 놀러 간다는 뉴스는 충격이었습니다. 어려운 영세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도시를 그렇게 방치해 왔다는 소식에 분노보다는 슬퍼졌습니다. 물론 영세상인의 삶도 중요하여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시의 재생사업 정책으로 세운상가를, 종로를, 창신동 빈민촌 같은 곳조차 방치한 전 서울 시장의
10년 허송세월은 어떤 이유로든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정책 입안자들이 자신의 능력이 문제임을 깨닫지 못한 탓이며 그들을 선택한 시민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지키고 살게 만든 것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거지요. 자신이 본 세계,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이거든요. 편리하면서도 매력이 있는 도시로의 전환이 중요하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도시는 자연히 활성화될 것입니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적응하기조차 숨이 가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수십년 전의 마인드로 시민의 삶을 호도하는 정책의 입안자는 누구인지, 광주를 생각하니 그가 궁금했습니다. 광주나 마르세유나 모두 정치인들의 파행적이고 이기적인 관행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겠지요. 빨리 마르세유처럼 광주 시민도 깨어나시기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언어장난이 아닌 참 예향의, 문화의, 민주화의 도시로 거듭났으면 기쁘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갔지만 마르세유의 여행이 긍정적이었던 것은 광주를 떠올렸고 광주와 비교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 마음에 품고 있던 그리움의 하나를 지우게 되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모두가 아니고 더 깊고 깊은 그리운 곳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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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
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 2006 자유칼럼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