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續) 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 [허찬국]

 

속(續) 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 [허찬국]


속(續) 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


2022.05.24

미소 짓는 불상, 눈물 보이는 불상
얼마 전 대구에서 잠깐 머물렀는데, 틈날 때 생소한 도시와 주변의 몇몇 명소를 둘러보았습니다. 대구미술관에서 본 불상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에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설치 작가 김승영의 ‘반가여래상 슬픔’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넓은 전시실 적갈색 한 면 벽을 배경으로 조명이 비추어진 이 작품은 몇 달 전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서 보았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두 반가여래상과 닮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았을 때 이 불상은 우는 얼굴이어서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 너머를 바라보는 듯, 고뇌하는 듯,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듯,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고, 치유와 평안이 다가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해설문 설명처럼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다 꿰뚫어보고 그 의미를 깨달은, 보는 이에게 평정심을 주는 전지(全知, omniscient)한 부드러운 미소의 반가여래상을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전시된 공간은 사유의 방에 비해 넓고 밝은 것과 관람객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자꾸 미소를 머금은 두 불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불교와 해탈 등에 대한 이해가 미천한 필자의 눈높이로는 불상의 눈물에 공감이 갔습니다. 중생의 수많은 번민과 고통, 바람을 접하고 있자면 슬퍼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미술관 방문 전날 팔공산 오르는 길에 보았던 갓바위 부처상 앞에 엎드려 소원을 비는 사람들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참배객 중에는 높은 돌계단 길을 오르내리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 이들도 여럿이었습니다. 비록 이런 일들이 큰 운명의 수레의 일부이며 어디엔가 이 모두를 초월하는 경지가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평온한 내세가 있으니 현세가 비참한 아비규환이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나아진다 해서 있을지 없을지 모를 극락이 평가절하되지는 않겠지요.

 

 



작품 옆 해설문에 따르면 작가는 “이 시대의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의해 휩싸이는 인간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과 인간이면 누구나 내재하고 있는 보편적인 슬픔의 감정을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는 불상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쉽게 떨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2011년 개관한 대구미술관은 녹지가 풍부한 산자락의 넓은 부지에 위치한 크고 멋진 전시관 안에 여유 있게 전시된 작품들도 다양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지도에서 멀지 않아 보여 걸어가기로 했지요. 삼성라이온스 야구팀 홈경기가 있는 시간에 구장 앞 지하철 역에서 걸어서 갔는데 몇 번 건너야 하는 길에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할 요량으로 나섰던 길이라 단지 내에 카페나 식당 등 편의 시설이 없어 좀 난감했습니다. 미술관이 도심이 아니라 초목 우거진 들판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좌) 사유의 방 반가여래상 (우) 김승영 반가사유상 슬픔



1시간마다 있는 셔틀버스로 지하철역을 향하며 접근성이 개선되어 관람객들이 많아지고 편의 시설도 들어서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명상과 현대 미술이 만나는 로스코 예배당 50주년
관람객을 명상으로 이끄는 런던 테이트 현대미술관의 ‘로스코 방’의 전시 작품들은 그가 생전에 특정 장소를 염두하고 제작한 시그럼 벽화 연작의 일부입니다. 의뢰받았던 작품들의 전시 장소, 부티 넘치는 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 원래 전시 계획이 무산된 프로젝트였지요. 이에 비해 미국 텍사스 남부 대도시 휴스턴에 소재한 로스코 예배당(Rothko Chapel)은 화가가 그 지역 독지가의 의뢰와 지원하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될 공간에 대한 구상을 실현하며 보람을 느꼈던 프로젝트입니다.

 



무종파, 또는 초(超)종파 예배 공간(nondenominational chapel, interfaith space)은 종교색이 없는 영적인 사색의 장소로 애초 구상되었고 현재에도 원래 취지대로 운영되고 있는 곳입니다. 의뢰자의 발상에 크게 공감한 로스코는 1964년부터 여러 해 동안 열성을 다해 내부에 걸린 14개의 벽화를 준비했고, 자신의 작품에 맞추어 건물 구조의 설계까지 깊이 관여했다고 합니다. 한 언론의 기사는 이곳을 ‘명상과 현대 미술이 만나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팔각형 모양의 건물 내부에는 로스코의 대형 벽화와 나무 벤치만 배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의 반응은 테이트의 ‘로스코 방’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좌) Rothko Chapel 내부, (우) Rothko Chapel을 배경으로 한 Barnett Newman 의 Broken Obelisk 

1971년 개관 1년 전에 타계한 터라 완공된 모습을 못 보았지만 이제 이 공간은 휴스턴 지역의 명소로 알려졌습니다. 로스코 예배당 누리집에 따르면 개관식 때 유대교, 카톨릭, 개신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 불교 종교인들이 예배 의식을 진행했다 합니다. 건물 밖에는 마틴 루터 킹을 기리는 유명한 조형물(Barnett Newman 의 Broken Obelisk)이 설치되어 있고, 미술과 명상의 공간일 뿐 아니라 미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며 작년 개관 50주년을 맞았지요.

작년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되었던 개관 50주년 기념 음악회도 주요 언론에서 문화∙예술 부문 주요 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 개관 당시에도 저명한 미국의 현대 음악가 모톤 펠드먼(Morton Feldmen, 1926~1987)이 ‘Rothko Chapel’이라는 음악을 만들어 연주했고, 50주년에는 천재적 음악가로 명성이 높은 타이션 서레이(Tyshawn Sorey)가 성악과 몇 가지 악기로 편성된 ‘Monochromatic Light (Afterlife)’를 작곡하여 연주했다고 합니다. ‘단색의 빛(내세)’ 쯤으로 해석되는 곡의 제목은 로스코의 단색화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올 2월 뉴욕타임스의 관련 기사에 인용된 한 음악가가 로스코, 펠드만, 서레이의 작품들을 망라해 잘 설명합니다. “타이션이 만든 것은 추모공간이다. 로스코와 펠드먼은 침묵, 슬픔, 그리고 암흑으로부터 추모공간을 만들었다. 그 암흑의 장(場)에서는 잊혀졌으나 거기 머물고 움직이며 말하는 역사와 삶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펠드먼과 로스코는 그들의 역사를 그 공간으로 가져왔다.” 서레이는 작곡 기간 로스코 예배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짙은 단색화의 모습과 느낌이 일조(日照)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은 그림의 느낌을 소리로 빚어낸 것이라지요. 예술가들의 무궁무진한 영감은 참 경이롭습니다.

 

 


(주) 이 글은 2022.1. 7 칼럼 ‘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Rothko Room)’에 이어짐.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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