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하고 기분 나쁜 ‘사자성어’ [황경춘]

 

 

살벌하고 기분 나쁜 ‘사자성어’ [황경춘]


살벌하고 기분 나쁜 ‘사자성어’
2022.05.12

제가 자란 경상도 시골에서는 '박살낸다'는 말을 잘 썼습니다. 전구를 갈아 끼우다가 잘못해서 바닥에 떨어뜨려 박살났다는 식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검수완박'을 처음 들었을 때 '검찰 수사권 완전 박살'로 잘못 알아듣고 아무리 비정한 정치풍토이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전 박살'이 아니라 '완전 박탈'이라고 다시 알게 된 후에도 이건 국회에 제출한 법안(물론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으로는 너무 살벌한 분위기를 주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외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며 사자성어(四字成語)는 한자로만 만드는 것으로 알았는데, 고향 출신 정치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1996년 여당(신한국당)​ 대변인일 때 만든 것으로 알려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시작으로 한글로 된 '사자성어'도 가끔 언론에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검수완박'처럼 분위기 나쁜 사자성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20명도 안 되는 교직원 중 조선인 교사가 단 한 사람 있었습니다. 해방 후 모교를 비롯한 도내 중등학교 교장을 지내고 타계하신 박 선생님은 당시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일본 도호쿠(東北)지방에서 공부할 때 익힌 그 지방 특유의 방언을 섞어 쓰는 박 선생님의 강의는 우리 어린 학생들의 웃음을 유발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백의 시구(詩句)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을 설명하면서 “흐르는 물이 날아 바로 밑으로 삼천 척 떨어진다”라고 일본 사투리를 섞어가며 설명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학생들이 큰 소리를 내며 웃어 당황하게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이분에게서 배운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사자성어가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학생인 저에게 큰 충격을 준 기억도 있습니다.

박 선생님의 설명을 지금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는 없지만 백세를 바라보는 지금의 제 처지가 이 사자성어가 표현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3회 4시간씩 받는 투석 치료와, 투석 후 집에 돌아와 별로 하는 일 없이 멍하게 지내는 것과, 이러다가 꿈꾸는 듯 저세상으로 떠날 것을 생각하며 허무하게 시간만 보내는 매일의 생활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달리할 용기도 없는, 그야말로 '취생몽사'하는 나날입니다. 요즘엔 나이든 사람들이 '걸생누사'(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라는 말도 많이 하는가 보던데, 이것도 사자성어라면 사자성어겠지요.

어릴 적에 본 사자성어의 추억도 잊지 못합니다. 옛 시골집에는 큰 대문이 있었습니다. 매년 입춘(立春) 날이 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대문의 큰 문짝 두 개를 깨끗이 물청소를 한 후 그 위에 '입춘(立春)'과 '대길(大吉)'이라고 백지에 크게 적은 두 장을 정성스레 붙였습니다. 그리고 위채, 아래채 기둥마다 입춘에 쓰이는 한자로 된 문구들을 써 붙였습니다. 제가 지금 기억하는 것 중에는 '입춘다경(立春多慶)',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입춘만복래(立春萬福來)' 등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명필은 아니었지만 학교 습자(習字) 시간에 붓글씨를 배운 저보다 훨씬 훌륭한 필체로 한문 문구를 쓰셨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이런 입춘 문구를 써 붙일 한옥이 아니어서 얼마나 서운하셨겠습니까. 제가 장자여서 시골집을 청산하고 서울로 모셨습니다만 부모님을 상경하시게 한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자성어 이야기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 개인적인 감상에 젖었습니다. 어릴 적 순수한 마음으로 외할아버지에게서 배운 천자문의 사자성어가 이제는 '검수완박'이라는 험악한 정치구호로 바뀌었습니다. ‘검수완박’의 불똥이 부디 윤석열 새 정부의 출범에 큰 지장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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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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