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27년생, '가죽띠'[방석순]

카테고리 없음|2022. 4. 5. 09:32

 

 

형님은 27년생, '가죽띠'[방석순]


형님은 27년생, '가죽띠'
2022.04.05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입니다. 산에 들에 화사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납니다. 이 찬란한 봄날 숨이 지는 생명도 있습니다. 오래 와병 중이던 가형(家兄)은 지난 주말 마침내 먼 길 봄 여행을 떠났습니다. 만 86세, 더 장수하는 이들도 많지만 너무 섭섭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연치(年齒)입니다. 그러나 중학생 어린 나이에 6·25 전란을 맞아 거제로, 부산으로, 서울로 물설고 낯선 타관을 돌며 온몸으로 부딪쳤을 피란살이의 역정을 생각하면 그저 아득한 슬픔에 할 말을 잊게 됩니다.

흥남 부두에서 미군 상륙정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형님은 이렇게 긴 타향살이를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침 출타 중인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도와 동생 넷을 이끌고 며칠 난리를 피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핏덩어리 막내딸을 안고 있던 어머니도 급한 마음에 그냥 두어서 위험하다고 생각한 귀중품 몇 가지, 그리고 막 아침상에 올렸던 음식 몇 가지를 들통에 담아 집을 나섰던 것입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또래들이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형님은 땔감 나무도 해다 팔고, 남의 옷가지도 대신 팔아주며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솜씨였겠지요. 형님은 시장에서 대량으로 주문받아 옷감을 마르고 재봉틀로 옷을 지어 납품하는 일로 이른 나이에 어엿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너른 방 하나가 곧 작업장이자 식당이요, 침실이자 공부방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 형님의 졸음 쫓는 휘파람 소리, 동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한 방에 어우러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종일 방안 가득 옷감을 펼쳐 놓고 본을 펴서 옷감을 마르던 형님에겐 끼니때가 바로 휴식시간이었습니다. 형님은 옷감 자투리에 멋진 그림을 그려 보이기도 하고, 언제 빌려왔는지 소설책을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김래성의 ‘검은 별’은 온 식구가 귀를 쫑긋 세우고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 추리작가 르블랑의 번안소설도 많이 읽었습니다. 만화책 ‘밀림의 왕자’도 대단한 인기였지요.

이제 형님이 자리를 비우면 어머니도 동생들도 살길이 막막해질 그 무렵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은밀한 작전을 폈습니다. 형님 나이를 졸지에 여덟 살이나 올려버린 것이지요. 징집 연령에 이른 남자들에겐 경찰, 형사들의 불심검문이 잦아 하루하루가 불안하던 때였습니다. 갑작스런 신상변화에 미처 적응 못한 형님의 기막힌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어느 날 납품할 물건들을 운반하는데 사복형사가 불쑥 묻더랍니다. “자네 무슨 띠야?” “예에~ 저는 가죽띠인데요.” 북에서와는 달리 남에선 소띠니 돼지띠니 하는 출생연도의 간지로 나이를 가늠하곤 하더랍니다. 평소 자신의 본 나이가 무슨 띠인지도 잘 모르던 차에 전혀 엉뚱한 연도의 띠를 맞히자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어려웠던 시절의 본의 아닌 병역 기피가 평소 대바르고 부정한 것에 남다른 거부감을 드러내던 형님에겐 아마도 깊은 내상으로 남은 듯했습니다. 팔순이 다 된 어느 날 마치 넋두리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 둘, 아들 셋이 모두 현역복무를 마쳤으니 나도 국방에 조금은 기여한 게 아닐까?”

어린 시절 형님은 어른들 몰래 시계를 한 방 가득 뜯어 펼쳤다가 야단맞으면 잠깐 사이 감쪽같이 조립해 놓아 모두를 놀라게 했답니다. 알루미늄 그릇을 많이 쓰던 때의 일입니다. 형님은 낡아서 찢어진 그릇을 가위로 오려내 그 조각들을 붙여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배 뒤편에 배관을 만들고 촛불을 얹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촛불로 데워진 공기가 배관 속 물을 뒤로 뿜어내 달리는 증기선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형님은 동생들에게 휴대전화 하나씩을 나눠주고 만나기만 하면 붙들어 앉히고 사용법을 강의했습니다. 피곤한 자리를 모면하려고 “형님, 휴대폰이나 컴퓨터나 똑같아요. 컴퓨터를 좀 해보세요” 하고 권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시던 형님은 어느새 고향 친구들 모임의 온갖 사무를 컴퓨터로 처리하고, 소소한 소품들의 온라인 구매를 대신해주고, 동영상을 만들어 나눠주며 즐거워했습니다. 북에서 러시아어 알파벳만 배웠을 뿐 영어를 제대로 익힌 적이 없어 무척 고생했었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야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형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건하고 불같은 성품을 가졌었습니다. 여든이 넘도록 동생들보다 걸음이 빠르고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이나 주위의 나약한 모습에 언짢은 기색을 보이곤 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잖아요?” 해도 “나 같으면 한강에 뛰어들어 버릴 거다.” 하며 못마땅해했습니다. 정작 당신의 몸이 갑작스럽게 상해서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부터는 그런 의지도 말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눈에 보이는 듯해서 더욱 서글펐습니다.

나이 들고 병이 깊어지면 제 몸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먼 곳으로 형님을 떠나보내면서 형님이 소망했으나 끝내 찾아내지는 못했던, 새털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먼지처럼 조용히 사라져 가는 법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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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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