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량세태가 시스템이 되어서야 [정숭호]
염량세태가 시스템이 되어서야
2022.03.29
13일: “경기남부경찰청, 이재명 ‘옆집 GH 합숙소 비선캠프 의혹’ 수사”
23일: “경기도, 김혜경 법카 의혹 배씨 고발”
24일: ”공수처 ‘성남FC 의혹’ 박은정 성남지청장 입건“
25일: ”검찰, 탈원전 인사 비리 의혹, 산업부 압수수색“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닷새도 안 된 지난 13일부터 이런 제목의 기사가 잇달아 나옵니다. 모두 ‘국민적 의혹’ 혹은 ‘공분’을 불러일으킨 지 오래고, 야당과 시민단체가 진상을 밝히라며 공수처, 검찰, 경찰에 고소·고발한 것도 그만큼 오래인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수사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더니 야당이 승리하자마자 큰일 날세라 팔을 걷어붙이고 수사를 서두른다는 겁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대선 기간이라 선거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수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라는 게 수사 당국자의 설명이지만, 글쎄요 여당이 이겼어도 이처럼 서둘러 수사에 나섰을까, 쓴웃음 짓는 분들이 많습니다. 모두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 다시는 되풀이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의혹’임은 분명합니다만, 새 정권이 들어서기도 전에 서로 앞 다퉈 본격 수사에 뛰어들고 있으니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알아서 기는 것”이라는 비아냥도 받을 것 같습니다.
배운 지 오래인 사자성어 ‘염량세태(炎涼世態)’의 뜻이 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시 ‘풀’은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는 명구 때문에 사랑을 받습니다. 그가 무엇을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나는 풀”에 비유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한데, 지금 같으면 눈치 빠른 수사기관 간부들도 그중 하나일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것이, 어쩌면, 대통령 당선인 윤석열이 중시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후보 시절 자신의 국정 경험 부족에 대한 여권의 비판에 “전문가를 잘 발탁해서 시스템으로 나라가 돌아가도록 하겠다”며 대응했던 그는 당선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는 “대장동 수사는 오늘 이야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아니냐”면서도 “이 문제는 시스템에 의해 가야 할(풀어야 할) 문제”라며 자신이 ‘시스템주의자’임을 거듭 밝혔습니다.
시스템에 의지한다는 것은 법과 제도, 전통과 관행에 따라 문제를 풀어간다는 말이겠지요. 대한민국에는 아직 법과 제도가 살아 있으며, 전통과 관행도 뿌리 깊고 오래됐으니 이것들만 잘 지키도록만 하면 대한민국은 알아서 잘 돌아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일 겁니다.
범죄 수사와 관련해 그가 믿고 있는 시스템은 “의혹이 있으면 수사하고, 수사를 통해 범죄자로 밝혀지면 단죄한다”는 단순한 원칙으로 가동되는 것일 테고, 지난 5년간 여권의 집요한 공격으로 그 시스템이 크게 삐걱거리고는 있지만 오랜 검사 생활에서 겪은바, 그 시스템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고, 집권한 후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최소한 현 정부가 들어서기 전의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도 몰랐을 겁니다. 삐걱거리기만 하던 한국의 시스템이 자신의 당선과 거의 동시에 마치 타이머나 리모컨, 요즘에는 휴대폰으로도 가동된다는 최고급 가전제품처럼 슬그머니, 부드럽게 작동을 시작하리라고는 말입니다. 25일 보도된 “文인사에 반기 든 감사원 ‘감사위원 임명 청와대, 새 정부와 협의를’”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한국의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감사위원을 지금 대통령이 임명하면 현 정권의 비리 감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당선인 측의 염려와 걱정을 지금 정권이 임명한 감사원장이 “걱정 붙들어 매소. 그런 의도라면 우리가 감사위원 임명을 거부해 버리겠소”라고 나선 것이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니 한국의 시스템에는 법과 제도와 전통과 관습 외에 앞서 말한 ‘염량세태’도 포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염량세태’는 “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하여 따르고 세력이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상인심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정권이 바뀌기 전인데도 여러 권력기관이 현 정권을 푸대접, 나아가 배신하는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고 있으니 이게 ‘염량세태’가 가져온 효과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는 겁니다.
“염량세태가 시스템이 되어서야”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설명이 다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첨’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당선인은 대통령에 취임해서 아첨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 쓴 것처럼 “성공과 출세는 오로지 논공행상의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잘하는 것에 달렸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멀리하면서,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이 ‘만델라 평전’에 쓴 것 처럼 “절대권력의 달콤한 묘약을 마셨다가 자신은 물론 나라까지 망친 지도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랬다가는 아무리 잘 다진 시스템도 곧바로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사람이 미국 바깥에도 많은 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대통령이 된 직후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샘 레이번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백악관에 있으면 당신 눈과 귀를 가리려는 자들이 많을 거요. 당신을 왕처럼 모시겠다고 나서는 자들도 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나 나나 우리 서로 알잖소? 당신이 절대로 왕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처신을 잘 하시오.” 레이번의 충고를 따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백악관의 트루먼은 주변에 재담꾼은 뒀어도 아첨꾼은 두지 않았습니다. 당선인에게도 이런 충고를 해줄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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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2006 자유칼럼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