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세월은 흘러…[황경춘]
참고로 황경춘 자유컬럼 작가님은 올해로 99세이십니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
2022.03.08
"와! 아버지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가 있네요!" 좀 전에 배달된 시골 고등학교 서울 총동창회 명부를 보고 있던 딸이 호들갑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11년 만에 새롭게 편집되어 발행된 새 명부를 보니 제가 졸업한 14회 앞 기수의 선배들 중에는 생존자가 한 분도 없었습니다. 물론 서울 및 수도권에 거주하는 동창 명부이기는 하지만 11년 전 명부와는 너무나 달라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했습니다.
2020년 90회 졸업자까지 기수별로 나눠 올린 총 440여 쪽의 방대한 명부는 14회부터 20회까지의 졸업생은 한 페이지에 묶어서 싣고, 그 아래는 전부 기수별로 분류하여 이름, 직장, 주소, 전화번호를 싣고 있습니다. 학교 측 자료에 의하면 작년 91회 졸업생까지 포함해 총 3만2,741명이 졸업했다고 합니다. 서울 동창회명부에 올라 있는 총인원이 몇 명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1925년에 국립고등보통학교로 설립 개교한 우리 학교는 3년 후면 개교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1942년 4월 저의 입학과 동시에 학교명은 고등보통학교에서 중학교로 바뀌고, 처음으로 일본인 학생 51명의 입학도 허락되고, 조선어는 교과목에서 빠졌습니다. 교내에서는 일본어 전용이 강요되고 복장은 소위 국방색 전투복과 군화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와 만주국 독립 이후 중국과의 국지적 분쟁을 전면 전투로 확대시켜 국가 총동원 태세로 바꿨습니다. 전투인원이 부족하자 조선인의 군 지원을 장려하다가 일본 본토민에게만 적용하던 징병제를 조선인에게도 적용하여 1923년 12월 이후 출생 조선인의 징병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기생은 거의 이에 해당하여 저를 포함해 많은 동기생이 해방 전에 일본군 입대 경험을 했습니다. 동기생 가운데 한 명은 만주에서 유학하던 중 태평양전쟁 종전 일주일 전에 소련이 참전하자 현지 징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련군 포로가 되어 근 30년간 소련에서 살다가 귀국한 바 있습니다.
11년 전 명부를 작성할 때 서울에는 여섯 명의 동기생이 생존하고 있어 매달 14일 인사동에 있는 한식집에서 빠짐없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후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는 동기생이 늘기 시작하여 한 5년 사이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도 아내를 따라 요양원에 들어가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동기생 모임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새 동창회 명부를 받아보며 그야말로 여러 생각이 오갑니다. 우선 한 10년은 이 명부가 살아 있을 테니 저도 적어도 몇 년은 더 살아야 면목이 서지 않겠느냐는 이기적인 생각부터 납니다. 약 10년 전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그녀가 대통령이 되는 날을 보고 죽었으면 하는 꿈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널드 트럼프에 패배하고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트럼프 정부 4년을 경험했지요. 그 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여론을 뒤집고 트럼프를 백악관에서 쫓아내는 꿈 같은 정치 드라마를 보고 이제는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한 저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저 고통 덜 받고 아이들 고생 덜 시키고 가겠다는 이성적인 생각은 어디로 가고 슬그머니 세속적인 욕심이 늘어가기 전에 빨리 저승사자가 인도하러 오기를 바라는 것이 최근에 생긴 저의 소망입니다.
다만 사람은 누구든 사는 날까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버지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시민으로서 자기 몫과 역할을 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런 생각에서 저는 20대 대선 사전투표도 힘겨웠지만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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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2006 자유칼럼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