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과 적성검사 [홍승철]

기억력과 적성검사 [홍승철]

 


기억력과 적성검사
2022.03.03

병의 증세는 신체에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뇌의 신경에서 비롯되니 다양한 기능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중에 기억력 문제도 있었습니다. 단순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체 중심으로 치료를 받으면서도 시간 경과에 따라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갔지만 치료 시간에 선생님이 “어제처럼 두 손가락만으로 집으세요” 하면 “어제 그랬다구요?”식으로 반응하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건강할 때도 기억력이 나빴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뇌경색 발병에 따른 기억력 감퇴 현상은 빠른 속도로 좋아졌습니다. 지금은 거의 발병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발병 이전의 상태입니다. 오랜 세월 기억력이 나쁘다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물건을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해서 허둥대던 일은 많은 경험 중 하나입니다. 한두 번 만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자주 발생합니다. 얼굴은 기억하는데 이름을 잊은 경우도 많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이의 얼굴을 못 알아본 일도 있습니다. 회사 근무 시절 엘리베이터에서 회사원이 아닌 한 여인이 인사를 했습니다. 알아보지 못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회사 동료의 부인으로서, 해외 파견 나간 남편의 일로 인사부서를 찾아온 거였습니다. 공장 사택에 근무할 때는 두 가족이 자주 어울리기도 했을 뿐 아니라 그 부부의 결혼식 사회를 맡기도 했는데 말입니다.

 

 



과장 시절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사업부장인 전무의 방에 가서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나서는 순간 “무슨 지시를 받은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되돌아서서 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슨 소릴 들으려구요. 노트도 들고 있었는데 메모를 하지 않은 일을 탓해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그날 오전 내내 지시사항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습니다. 요즘 전무님의 관심이 무언지, 사업부의 문제가 어떤 것이 있나 등 점심을 걸러 가며 그 생각만 골똘히 했습니다. 점심시간 끝나갈 무렵 간신히 지시사항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의식이 들면 자주 고등학교 때의 적성검사를 떠올렸습니다. 적성검사 결과는 수많은 직업을 열거하고 어느 직업이 자신에게 적합한지 예시하는 거였습니다. 추천 직업에는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간 결과에는 관심이 갔습니다.

중간 결과란 직업에 필요한 재능을 10여 가지로 분류하고 재능별 백분위 점수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재능별 점수는 대부분 거의 비슷한 수준의 점수였는데 두 가지가 현저하게 낮았습니다. 기억력과 수공입니다. 기억력과 수공에 관계되는 문제가 발생하면 이 적성검사 결과를 떠올릴 때가 많았습니다. 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 작은 공구로 집안일 하기 등을 잘 하지 못하는 건 수공 재능이 낮아서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읽은 신지식을 실생활에 곧바로 적용 못하는 것, 영화나 소설의 스토리를 남들만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 등은 기억력이 나빠서 그렇다고 판단했습니다.

남들보다 어릴 때의 상세한 기억이 많다든가 남들이 기억 못하는 특정한 사례를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억력이 나빠서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해. 그 대신 오래 기억하고, 상세히 머릿속에 남아 있어. 기억의 양이 적으니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럴싸하게 합리화하는 거죠. 어떤 때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무언가 (충격과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거나 열정을 쏟으며 했던 일은 잘 기억하게 되는 것 같아.”

돌이켜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잘못한 일은 적성검사 결과 탓으로 쉽게 돌렸습니다. 그전 생각과 다른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 예로 2000년대 들어 메모하기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전에도 업무 노트를 사용했지만 중요 사항만 기록했습니다. 이제는 사소한 일, 언뜻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노트뿐만 아니라 작은 메모지에도 적기 시작했습니다. 메모하는 일로 기억력을 보완하게 되었습니다. 메모하니 기억력도 좋아진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 기억력 나빠서 잘 잊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과거에 메모를 열심히 하지 않은 습관과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생각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 일입니다. 메모에 좀 게을러지면 당연히 기억량도 그만큼 적어졌습으니까요. 이제서야 적성검사를 구실로 잘못한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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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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