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직’까지는 아니더라도[정숭호]
‘초정직’까지는 아니더라도
2022.02.22
초정직(超正直)’은 사전에는 없는 영어 ‘super-honesty’를 우리말로 바꿔 본 겁니다.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어머니가 마흔 넘은 아들이 하는 짓을 보고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정직이 아니라 초정직이지!!”라고 말입니다. 칭찬보다는 어처구니없어서 한 말이랍니다.
1945년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의 첫 공직은 고향인 미주리 주 잭슨카운티 수석판사였습니다. 1920년대였지요. 당시 이 직책은 법정에서 재판을 이끄는 법관이 아니라 각종 공공 공사를 발주하고 감독하는 행정직이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이 말을 했을 때는 트루먼이 650만 달러짜리 도로공사 발주서에 사인을 한 직후였습니다.
트루먼의 어머니는 이 공사를 무척이나 기다렸습니다. 집이 있는 농장 앞에 새 길이 뚫리는 것보다는 보상비를 받아 농장을 담보로 끌어낸 융자를 갚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름으로 된 농장 부지 중 11에이커(약1만3,500평)가 이 도로에 편입될 예정이었는데 에이커당 1,000달러씩, 1만1,000달러의 보상비를 받아 은행에서 빌려 쓴 8,900달러를 갚겠다는 게 어머니 생각이었습니다. 남는 돈으로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농사지으며 궂은일을 해온 자신에게 ‘투자’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트루먼 어머니는 보상을 못 받았습니다. 트루먼이 “수석판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어머니에게 ‘특혜’를 제공했다는 말이 나올까봐” 보상 대상에서 어머니 농장 부지를 제외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전기작가로 유명한 데이비드 매컬로우가 1993년에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트루먼 전기 ‘트루먼(Truman)’에 나옵니다.
매컬로우에 따르면 어머니가 받은 융자는 사실 트루먼이 가져다 썼습니다. 공직에 나서기 전에 사업을 하다가 불경기 탓에 말아 먹고 꽤 많은 은행 빚을 지게 된 트루먼이 은행에서 독촉장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어머니 농장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급한 불을 껐다는 겁니다. 보상비로 아들 빚을 털어주고 은행 독촉에서 벗어나려 했던 어머니는 아들이 보상 대상에서 자기 농장을 제외했다는 걸 알고는 “어릴 때부터 정직하게 살도록 가르쳤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직이 아니라 초정직!”이라고 무척 섭섭해했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보상을 못 받게 ‘방해’한 트루먼은 “뒷말 듣는 것을 두려워한 졸보, 꽁생원이었나? 소심하기 짝이 없는 새가슴이었나?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의 행복을 희생시킨 위선자였나?”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소련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쓴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 트루먼은 청렴과 정직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덕목이 미국 정치의 변방이었던 미주리주 ‘깡촌’ 출신의 고졸 학력 농부인 트루먼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트루먼이 얼마나 청렴, 정직했는지 사례를 몇 개 더 들겠습니다.
-1934년 미국 연방상원의원이 된 트루먼은 당시 상원의원 98명 중 가장 가난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에 온 그는 정치적 후견인이 미주리주의 부패한 정상배라는 소문이 나서 처음에는 보좌관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트루먼이 매우 싼 월세 아파트를 빌리고, 유일한 취미인 피아노도 렌트로 들여놓는 것을 본 한 젊은이가 트루먼이 부패하지 않은 정치인임을 알고 보좌관 되기를 자청해 이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해외 시찰에서 술과 여자가 있는 ‘향응’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원의원들이 많을 때였는데, 트루먼만 호텔 방에 남아 책을 읽거나 아내-베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여자, 이 세 가지가 남자를 망칠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권력을 원하지 않았으며 돈도 가져본 적이 없다. 내 인생에서 유일한 여자는 지금 집에 있다.” 이 말은 트루먼이 남긴 말 중 자주 회자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자기 집이 없어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장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상당한 명문가 출신인 장모는 이런 트루먼이 마음에 안 들어 평생토록 사위를 ‘해리’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미스터 트루먼”이라고 불렀답니다. 우리 장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나를 “정 서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봐요, 정숭호 씨!!”라고 부르다가 가셨다면 내 삶은 많이 끔찍했을 겁니다.
-2010년 월스트리트저널 조사에서 트루먼은 미국 역대 대통령(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 44명 가운데 가장 가난했던 걸로 나타났습니다. 오바마 이후 대통령이 된 트럼프와 바이든을 넣어도 순위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1925년 이후 취임한 대통령 중 재산이 안 늘어난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트루먼이 돈 걱정에서 놓여난 건 후임인 아이젠하워 때 연금법이 시행된 이후였습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지 몇 년 후 어머니 농장 부근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섰는데 그때 농장을 판 덕에 빚에서 완전히 헤어났습니다.
20대 대통령선거가 보름 남았습니다. 나는 트루먼만큼 초정직, 초청렴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나랏돈과 자기 돈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과나 귤 상자에 썩은 게 하나만 있어도 금세 다른 것까지 썩어나갑니다. 작은 알이 썩어도 그럴진대 제일 큰 놈이 먼저 썩어 있다면 더 볼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이라는 상자 속 사과, 더 썩는 건 막아야겠습니다.
아, 트루먼의 초정직, 초청렴은 부인 베스의 '초검소'로 더욱 빛났다고 합니다. 베스는 화려하고 비싼 옷으로 자기 몸을 꾸미지도, 입맛대로 음식을 골라 먹지도 않은 퍼스트레이디였기 때문입니다. 주로 대중 의류점에서 옷을 사 입었던 베스는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은행가 부인을 따라 워싱턴 상류층 사모님들이 드나드는 고급 양장점에 갔습니다. 직원이 이 옷 저 옷을 꺼내 입어보라고 권하자 “아무것도 보여주지 마라. 여기 옷은 어떤 것도 내가 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라고 뒷걸음쳤다고 합니다.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노어는 부잣집 며느리라 집안 돈까지 합쳐 한 달에 7,000달러를 식비로 썼지만 베스가 안주인이 된 후 백악관 식비는 한 달 2,000달러로 줄었고, 매달 가계부를 맞추는 게 베스의 큰일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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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2006 자유칼럼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