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은 없다 [박종진]




직선은 없다

2022.01.12


잘 쓴 글씨란 뭘까? 지금도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글씨는 멀었고,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인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물론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 등 반듯하게 쓴 해서(楷書)는 알아 볼 수 있지만, 어찌 서예의 세계가 해서만 있나요? 진시황 때 만들어졌다고 하는 인장(印章)에서 볼 수 있는 전서(篆書)가 있고, 전서 다음 만들어진 예서(隷書), 획을 줄여 쓴 행서와 초서 등이 있습니다. 그밖에 금문, 갑골 등등… 저는 해서와 전서의 교과서 중 고작 서너 개 정도를 써봤으니 서예 실력은 입문(入門) 단계입니다. 하지만 초보가 궁금한 것은 더 많은 법. 작년 그 유명한 호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줄여서 호태왕비 또는 광개토대왕비)를 막 시작할 때입니다

“선생님, 어린애가 쓴 것처럼 비뚤배뚤한 호태왕비는 잘 쓴 글씨인가요?” 솔직히 저는 호태왕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

 

스트레이터 홀더 초창기 만년필의 모습


한 유적으로 생각할 뿐,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잘 쓴 글씨 맞습니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당대 최고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붓을 잡고 “너무 반듯하게 쓰면 호태왕비체의 맛이 나지 않습니다. 나뭇가지나 사람의 팔뚝 그 어디 봐도 직선은 없습니다. 이렇게 구불텅한  자연스러운 글씨가 잘 쓴 글씨입니다.” 말씀 전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저는 머릿속에 숭례문(崇禮門)과  네모난 고층빌딩이 떠올랐습니다.

 

 

 



1929년 셰퍼는 위와 아래가 점차 곡선으로 가늘어지는 최초의 유선형 만년필인 밸런스(Balance)를 출시합니다. 만년필은 1883년 실용적인 워터맨 제품 이후 줄곧 곧은 막대 모양이었습니다. 뚜껑이 뾰족한 테이퍼 캡(taper Cap) 만년필이 있었지만 잠시였습니다. 이름 자체가 곧은 것을 의미하는 스트레이트 홀더(straight holder)와 이것에 뚜껑이 살짝 커진 콘캡(cone cap)이 만년필의 모양을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셰퍼는 50년 가까운 오랫동안 유지된 모양을 버리고 판을 깨는 유선형 만년필을 내놓았을까요? 더군다나 셰퍼는 파커와 더불어 가장 잘 나가던 회사였습니다. 여러 설(說)이 있지만 균형을 뜻하는 이름처럼 회사의 의도는 펜을 잡았을 때 손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 빠르고 편안하게 글씨를 쓸 수 있게 만들어졌고, 이것은 1930년대로 가기 위한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였습니다.

이 새로운 만년필은 성공했습니다. 파커와 월 에버샵이 따라하여 유선형 만년필을 내놓았지만, 이것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급하게 따라한 결과 곡선이 자연스럽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필요했고 1931년 월 에버샵은

1930년대 초반 셰퍼 밸런스


도릭(Doric), 파커는 1933년 버큐메틱(Vacumatic)을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경쟁자들이 쫓아오자 셰퍼 역시 밸런스를 다듬어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구슬 모양이던 클립의 끄트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고 밀착하여, 밸런스는 한층 더 완벽한 유선형에 가까워져 유선형의 주인은 영원히 셰퍼의 것이 되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권세가 길어도 십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1939년이 되자 새로운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워터맨이었습니다. 워터맨 역시 지난 십년 간 새로운 만년필을 계속 발표하고 있었지만 유선형엔 소극적이었습니다. 매출은 계속 떨어졌고 워터맨은 더 이상 일류(一流)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도약하길 원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펜이 헌드레드 이어(Hundred Year Pen)였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새로운 재질 루사이트로 만들어진 헌드레드 이어는 이전의 워터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유선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열 발산을 위해 만들어진 주름진 외관이 어색하여 이 만년필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유선형 만년필로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은 1941년에 등장한 파커51였습니다. 수년간의 연구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만든 파커 51은 여러모로 뛰어났지만, 물에 빠지면 금방 헤엄칠 것 같은 돌고래 같은 유선형의 몸체는 특히 아름다웠습니다. 파커 51은

 

몸체가 주름진 워터맨 헌드레드 이어의 1940년 광고


만년필 역사상 유례없는 큰 성공을 했고, 현대 만년필 시작이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됩니다.    

(좌) 1940년대 파커51 광고 (우) 2002년에 1,000개 한정 생산된 Pelikan  'Spirit of Gaudi'-차상욱 사진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가 이런 말을 했다죠 "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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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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