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순과 다섯 명의 경찰 [박상도]
조두순과 다섯 명의 경찰
2021.12.31
이달 중순쯤 조두순이 망치 피습을 당했습니다. 한 20대 남성이 조두순의 집에 들어가 집 안에 있던 둔기로 조두순의 머리를 때렸다고 경찰이 발표했는데 당시 현행범으로 체포된 그는 “삶에 의미가 없다. 조두순을 응징하면 내 삶에 가치가 있어질 것 같다.”는 진술을 했답니다. 법이 정한 형량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죗값이 워낙 차이가 나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겠지요. 그런데 이 뉴스에 실린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건 직후 조두순이 사는 빌라의 입구에 무려 다섯 명의 경찰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이웃 주민이 찍어서 올린 겁니다. 저들은 누구를 지키려고 저렇게 빽빽하게 서있는 것일까요? 조두순이 사는 동네의 이웃들에 따르면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조두순이 테러 위협을 받으면서 사복 경찰이 집 주변에 잠복 배치됐고 이번 폭행사건이 벌어진 뒤에도 잠복한 사복 경찰이 바로 달려가서 범인을 현장에서 검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복 경찰이 왜? 조두순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어야 하나요? 물론 형기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사람도 당연히 시민으로서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유별나게 보호받을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요? 혹시 조두순을 응징한다며 선량한 시민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복 경찰을 잠복 배치한 걸까요? 하지만, 상식적으로 범죄를 예방할 목적이면 위 사진처럼 정복을 입은 경찰을 배치하거나 주거지 입구에 ‘경찰이 감시 중’이라는 푯말을 잘 보이게 붙여 놓는 정도로 충분할 겁니다.
딱 보기에도 의경 같아 보이는 친구들이, 추운 날 관공서도 아닌 남의 집 대문에 저렇게 옹기종기 서 있는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필자만 그런 걸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들을 저기에 세워 놓은 건지 그 결정을 한 높은 양반의 머릿속이 참 궁금합니다.
“정작 지켜야 할 선한 시민은 내팽개치면서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잘 지켜주네.”
위 사진이 실린 기사에 달린 댓글입니다. 거의 모든 댓글이 위의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진주 아파트 방화·흉기난동 살인 사건으로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한 안인득 사건의 초기 대응을 저렇게 했더라면 참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사건 발생 몇 달 전부터 이웃들이 여러 차례 범인 안인득의 이상행동을 경찰에 신고했고, 조사를 한 경찰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고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경찰의 부실대응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전 남자친구의 스토킹에 시달리던 한 신변보호 대상자도 경찰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살해당했습니다. 게다가 경찰이 없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천 층간 소음 흉기난동 사건 때, 목숨이 위태로운 피해자를 놔두고 출동한 경찰이 황급히 도망간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도움을 요청한 시민이 목에 칼이 찔렸는데 현장에서 범인을 제압해야 하는 경찰이 도망을 가면서 소리를 듣고 올라온 동료 경찰에게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같이 도망가면, 남아있는 피해자와 그 가족은 누구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까? 국가에 세금을 내느니 이제 집집마다 총 한 자루씩 사서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 조두순 집 앞에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나 되는 경찰이 서있는 저 사진을 보니, 나라꼴이 참 우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권위가 실종된 지는 오래됐지만 그중에서도 경찰의 권위는 최근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떨어진 권위를 바로 세우려는 생각을 안 한 지도 오래됐다는 것입니다.
과잉진압과 인종차별로 종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미국 경찰은 스스로 권위를 지킵니다. 미국 고속도로에선 경찰차가 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주변의 모든 운전자들이 갑자기 얌전해집니다. 단 한번의 칼치기, 즉 무리한 차선변경도 미국 경찰 앞에선 허용되지 않습니다. 경찰의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면 지옥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따라잡습니다. 눈앞에서 신호위반, 일단정지 위반을 하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딱지를 끊습니다. 사소한 언쟁으로 경찰이 출동하는 경우라도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정리를 한 이후에도 다시 현장을 반드시 순찰하면서 문제가 종료됐는지 확인합니다.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경찰은 어떻습니까? 바로 눈앞에서 불법 유턴을 하는데 어떤 때는 못 본 척 외면하고, 어떤 때는 기둥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잡습니다. 운전자들은 단속을 당하면서 “명절이 가까워졌나? 경찰이 일을 하네?” “국고가 바닥났나? 범칙금 할당량이 내려왔나 보네?” 하며 비아냥거립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법규 위반은 귀찮으면 단속하지 않고, 어쩌다 하는 단속은 함정을 파고 하니 공권력의 권위가 설 수 없는 겁니다. 사실 함정 단속보다 훨씬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법행위에 무심한 경찰의 태도입니다. 일을 부실하게 하는 것은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사안이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사안인데 일을 안 하는 모습을 너무 자주 목격합니다. 범죄현장의 부실 대응 역시 이러한 근무태도가 빚은 참사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변명거리는 많을 겁니다. 미국 경찰과 달리 우리 경찰은 조금만 과잉대응을 해도 인권침해로 고발을 당하고, 민·형사상 소송을 당하면서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며 항변을 할 겁니다. 동료 경찰이 그런 일을 당하면 근무 의욕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그런데 세상 어느 직업도 다 저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금 내는 시민이 경찰의 근무 의욕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거 하라고 정치하는 사람 뽑아 준 거고, 국회에 행안위가 존재하는 거고, 그런 거 처리하라고 경찰 고위직이 존재하는 겁니다.
단순한 사진 한 장이지만 저 사진은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며 세금을 축내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알려지고 티 나는 곳에만 집중하는 이상한 행태의 유행, 보통 사람보다 더 보호받고 권리를 누리는 범죄자, 여기에 동원된 힘없는 의경 같은 불쌍한 대다수 국민들 등등, 분석할수록 짜증나는 사진입니다. 2021년 마지막 날입니다. 부적을 태워 없애듯이 사진 한 장을 태워 없애며, 새해엔, 물론 또 부질없는 소망이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희망을 걸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
2006 자유칼럼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