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흥남 - 그 해 겨울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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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흥남 - 그 해 겨울

2016.01.19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작년 12월 15일에 개막돼 2월 28일까지 열리고 있는 전시회의 이름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더 잘 알려진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됐던 미군 10만여 명과 10만 명 가까운 피난민의 흥남부두 철수를 주제로 한 전시회입니다.

이 전시회를 둘러보다 눈에 띈 한 글귀가 저의 발을 멈추게 했습니다.
“6·25전쟁 때 10만 명의 피난민을 흥남에서 철수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적어도 백여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은 나의 생애를 걸고 노력하여 이뤄야 할 일이다” - 현봉학

의사인 현봉학(1922~2007)은 흥남철수 당시 미 제 10군단의 고문관으로 철수 작전을 지휘하던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사령관에게 민간인 철수를 건의해 실행케 한 사람입니다. 공산 치하에 살던 민간인들을 구출해 낸 미군의 영웅적인 작전으로 알려진 흥남철수작전입니다.

그 작전을 성공시킨 주역이 그 작전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이산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이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그가 생애를 걸고 이루고자 했던 상봉이 분단 70년이 넘도록 일천만 이산가족 중 2,000명도 안 되고 있는 현실에 생전의 그가 얼마나 가슴아파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발길을 멈추게 한 또 하나의 글귀가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밀려나고 유엔군이 함흥에 들어왔을 때, 북한군 치하에서 벗어났다고 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은 난감했어요. 우리 집도 몰살될 수 있어 아버지가 저만 먼저 이웃과 함께 피난을 보냈어요. 그렇게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지요.” -신유항

함흥 태생으로 1950년 원산농업학교를 나온 신유항(87) 씨는 경희대 교수를 거쳐 현재 경기도 양평 곤충박물관장으로 있는 분입니다. 민초들 사이에서 피아(彼我)의 개념도 모호했던 6·25전쟁에서 그들은 점령군이 밀려와 만세를 부르라고 하면 불러야 했을 것입니다.

신씨는 운 좋게 남으로 피난을 와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염려대로 가족들은 만세를 부른 이유로 몰살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남한에서도 북한군이 왔을 때 만세를 부른 수많은 사람들이 부역 혐의로 아군에 의해 죽었거나, 월북을 했을 것입니다.

2008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유복연 씨의 유서에도 눈길을 떼기 어려웠습니다. 유씨는 임종 직전, 펜을 잡을 힘도 없는 듯이 흔들리는 필체로 ‘우리민족의 恨’이라는 제목의 유서를 썼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여 주세요.’로 시작되는 유서에서 유씨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도 못하고 88세로 마감합니다. (중략) 이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민족의 잘못입니까, 정치인들의 잘못입니까’라고 피를 토하듯 탄식했습니다.

그는 가계도와 함흥시의 고향집의 위치를 그린 지도를 유서에 붙였습니다. 자손들이 통일되는 날 찾아갈 수 있도록 길안내를 한 그 절절한 마음 앞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일천만 이산가족들이 남긴 이런 유서를 다 모으면 산더미가 될 것입니다.

그때 흥남부두에 모여든 10만 명의 피난민 중 상당수는 미군 철수가 끝나면 함흥일대에 대규모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에 겁먹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죽더라도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부모를 뒤로 하고 피난 온 자식들의 회한은 그래서 더욱 사무쳤습니다.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 얘기입니다. 철수 작전에 동원된 200여 척의 선박 중에서 23일 마지막 출항한 배였습니다. 군인과 군수물자를 후송하기 위해 미군이 빌린 상선이었는데, 물자 대신 정원의 10배가 넘는 피난민 1만4,000여명을 태웠습니다. 이 배의 라루 선장은 “그날 바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키를 잡은 것은 하느님이었다.”고 뒷날 회고했습니다.
 
이 배에는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같이 실려 있었습니다. 26일 거제에 도착하기까지 나흘 간의 항해 중 숨을 거둔 주검들은 칠흑의 바다 속으로 던져졌으나, 5명의 새 생명도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대신 김치 1,2,3,4,5로 명명되었습니다.

그 중 생존이 확인된 유일한 사람이 크리스마스 날 태어난 이경필(66) 씨입니다. 그의 부모는 피난민 수용소가 있던 거제에서 ‘평화사진관’ ‘평화상회’를 경영했습니다. 삶은 남루했으나 그들에게 평화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 정박 중인 미군 수송선 위에 피난민들이 빼곡히 승선한 가운데  배에 타려는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씨는 수의사가 되어 지금도 거제에서 평화가축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함경도 또순이 기질은 철수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피난 올 때 머리만 꺼내 싸들고 온 고모의 재봉틀은 훗날 국제시장에서 옷가게의 밑천이 됐을 것입니다. 건어물이나 엿을 챙겨온 사람 가운데는 배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어사전과 학교졸업장, 학교성적표 등을 챙겨온 사람들에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흘러간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오는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 달만 외로이 떴다’는 가사의 뜻도 알 듯했습니다. 부산의 영도다리는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수소문하는 피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장소였습니다.

영도다리 밑에 점집 거리가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합니다. 금순이의 오빠는 영도다리에서 온종일 금순이를 찾아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난간에 기대어 문득 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걸려있었을 것입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역사박물관의 이경순 학예연구사는 “흥남부두 철수의 군사적 측면 외에, 극한 상황에서 꽃핀 휴머니즘, 실향과 이산을 극복한 피난민들의 분투의 삶을 전달코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기획의도를 잘 살린 전시로 여겨졌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학예연구사 이경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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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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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필자는 1970년 중앙대 신문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일보사와 자매지 서울경제의 여러 부서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거쳤고, 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을 지냈습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 위원 및 감사를 지냈고, 일요신문 일요칼럼의 필자입니다. 필명인 드라이 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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