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며, 글을 가며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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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며, 글을 가며

2015.12.15


올해를 보름 남겨두고 2015년 저의 마지막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과 함께 시작한 한 해를 글과 함께 마무리하면서, 오롯이 글과 함께했던 지난 1년을 되돌아봅니다. 권태와 불안, 생존의 절박함이 무시로 밀려올 때마다 글은 제게 생기와 평안과 따듯한 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마디로 글은 몸을 가진 나와 영혼을 가진 나를 동시에 보듬고 보살펴 주었던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라고 해서 타인과 겨루고 빼앗고 경쟁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만 무엇을 먹든 뭐든 먹을 게 있다는 것에, 어떻게 입든 적어도 벌거벗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에, 어디에 몸을 누이든 눈비와 바람을 피할 수는 있다는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내게로 돌려야 하고, 쌓아놓은 지식을 지혜의 이름으로 덜어내야 하며,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과 무시당하기를 오히려 자초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우울해질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나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주는 섬세한 북소리와 세상 소음을 구분하여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따금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형편없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내가 자신들의 음악에 보조를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일 테지만, 헨리 데이빗 소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의 봄을 여름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맙게도 글쓰기는 제게 그런 자각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타인이 아닌 저의 음악을 듣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무리 지어 달려가던 대열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오롯하고 내밀한 나만의 오솔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올 한 해 저의 가장 값진 결실입니다.

희망은 땅 위의 길과도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지만 희망이 길을 만들었고, 나아가 각자의 희망이 각자의 길을 만들어 간다는 뜻이겠지요. 생명은 희망을 잉태시키는 토양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함께 있게 됩니다. 생명의 특성은 마치 길과 같이,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작용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생명의 본질은 변화함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이 생명답기 위해서는 자기 변화를 계속해야 하며, 그러한 자기 변화가 곧 성장이며 성숙입니다. 생명을 받아 이 땅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글을 통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지난 1년간을 그렇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흔히 수행이나 수련을 의미하는 ‘도를 닦는다'는 말도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본래적 삶을 다듬는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인(仙人)과 야인(野人)의 도상에 도인(道人)이 있다고 하지요. 길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저는 글을 지팡이 삼아 붙잡고 성장과 성숙의 길, 희망과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이제 2015년을 뒤로하며 잘 살아 낸 한 해를 자축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궁핍했고 인간적으로 외로웠지만 가난한 몸과 마음을 부싯돌 삼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내면의 화톳불 하나를 피워 올린 한 해였습니다. 그 희미한 온기에 의지해  2016년을 맞이합니다. 비록 단 한 보시기의 밥과 바꾸더라도 정직한 글을 쓰며 정갈한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했으니, 반칠환의 시 <새해 첫 기적>처럼 저도 나름의 발걸음으로 '기적처럼' 새해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새해 첫 기적> 반칠환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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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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