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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이 덥석 문 예술품을 보며
2015.12.09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작품전을 찾아갔습니다. 특히 우리네 문화 코드의 하나인 종이[紙]와 먹[墨] 그리고 붓[筆]으로 서양화와 동양화의 한계를 서슴없이 넘나들며 새로운 경지를 창조해낸 국내 미술계의 거장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 1929~)의 작품 전시회인지라 전시장을 찾는 필자의 마음이 두근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전시장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지필묵의 향기를 모르는 서양 문화권 미술 애호가들이 이 작품들을 본다면 자연스레 추상화 장르로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캔버스가 아닌 종이에 오일 안료가 아닌 먹물로 붓을 놀려 획(劃)에 속도와 힘을 실은 작품들이었습니다. 필자는 그의 작품들에서 조형미의 극치를, 그것도 구상과 비구상이 혼재하는 특유함을 보았습니다. 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서세옥 화백에게 “동양화와 서양화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회화 세계의 길을 개척”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사의 뜻이 절절히 묻어나는 전시 기획자의 ‘전시의 변’에 따르면, 2014년 서세옥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은 자그마치 100점에 달하며 그중 일부만을 전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작가가 국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읽은 순간, 필자는 참담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필자는 여기서 작가의 인품이나 작품성을 논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필자가 그럴 입장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미술계의 한 사람으로 심히 염려스러운 절차상의 오류를 지적하려 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존 소장품의 명단이 너무 ‘초라한’ 데다 작품을 구입하는 데 책정된 예산 또한 ‘빈약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술관은 검증된 작가의 작품을 기증받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자타가 인정하는 거장의 작품이라면 손을 내밀어서라도 소장품 리스트를 채우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국립 기관이 돈 안 들이고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는 기쁨과 고마움을 ‘전시의 변’에 담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국가 기관인 국립미술관이 생존 작가의 작품을 적절한 절차와 대가 없이 ‘기증해서 고마울 따름’이라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 일과 관련해 1990년대에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에서 몇몇 작가가 기증했다는 작품 전시회를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런던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s Gallery, London, (2010)]책자를 넘기다가 “(우리 미술관) 심사위원회의 위원 3/4 이상이 인정하는 경우에만 기증하는 초상화를 받는다.(No portrait shall be admitted by donation, unless three-fourths at least of the Trustees present at a meeting shall approve it.)”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요컨대 기증품에는 객관성보다 주관성이 개입하고, 그래서 사심이 작용할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한편, 세계 제일을 뽐내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는 기증 작품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우리 미술관의 ‘기증’과 MOMA의 ‘기증’은 분명 다릅니다. MOMA에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독지가가 평생 수집한 작품을 기탁할 경우에도 미술관 자체의 심의 기구를 거치는 엄격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런 절차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더욱 중요한 점은 작가 자신이 작품을 기증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국내 독지가가 수집한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한다면 상황이 많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 절차가 너무 단순하고 ‘직거래적인’ 양상을 띱니다. 마치 官이 문화예술품을 공짜로 덥석 물어버린 볼썽사나운 모양새입니다. 官이 官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높은 뜻을 손상시킨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현상’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노박덩굴 (노박덩굴과) (Celastrus orbiculatus)
널따란 호수 위를 건너오는 스산한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낙엽 쓸리는 소리가 처량하고 사륵사륵 사각대는 갈대의 몸 닳는 소리가 구슬픈 호반의 겨울 숲에서 만난 노박덩굴 열매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감고 늘어진 치렁치렁 뻗어 내린 가지마다 그득하게 달라붙은 노랗고 빨간 열매가 꽃처럼 화려합니다.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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