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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안단테’, 사랑은 ‘비바체’
2015.12.03
어느덧 송년회 모임의 계절입니다. 동창회나 향우회, 친목회별로 날짜를 잡는 약속 전화가 분주합니다. 그래도 연말에 한 번씩은 만나서 얼굴을 맞대야 직성들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해를 고이 보내주자는 뜻에서 ‘송년회(送年會)’라 하고,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을 빨리 지워 버리자는 뜻에서 ‘망년회(忘年會)’라 부르기도 하지만 폭탄주가 돌아가고 노래방으로 뒤풀이가 이어지는 모습은 거의 비슷합니다.스펙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카톡 밴드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성을 쏟는 것이 인맥 관리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지요. 연말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미 점심과 저녁 스케줄이 겹치기 시작한 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찬 모임까지 갖는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시간이 비게 되면 번개 문자를 날리는 것도 그런 분들입니다.이번 연말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모임들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출마 지망생들은 웬만한 모임마다 얼굴을 내밀고 고개를 조아리기 마련입니다. 지난 시절에는 밥값도 당연히 그들의 몫이었겠지만 요즘은 엄격한 선거법 때문에 지갑을 꺼내는 것을 오히려 말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기는, 출마 지망생들이 동창회 모임에서 생색을 낸다고 당선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밥 한 그릇 얻어먹었다고 기분이 흔쾌해지는 것도 아닙니다.하지만 그보다도 한 해를 보내며 서로의 우의를 확인하자고 모인 자리인데도 간혹 엉뚱한 말다툼이 벌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점차 나이들이 들어감에 따라 기존 관점에 집착하게 되는 데다 쓸데없는 자존심만 남기 때문에 부딪치는 현상입니다. 술이 몇 잔씩 돌아가면서 자칫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목청이 높아지고 삿대질이 오가게 되는 것이 그런 까닭입니다.아닌 게 아니라 며칠 전 갑작스럽게 마련된 번개 모임에 나갔다가 직접 겪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첫머리에 국정교과서 논란이 화제로 던져졌다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쟁점 내용이야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시 구체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그런대로 무르익어가던 막걸리 자리가 어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일단 찬반 양론이 벌어지게 되면 여간해선 가까운 친구 사이에도 양보라는 게 쉽지가 않으니까요.모임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태껏 잘 버텨오다가 마지막 한 달을 남겨놓고 얄팍한 감정의 바닥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별로 유쾌하지가 않습니다. 2015년을 시작하면서 가급적 흥분하지 말자고 했던 목표가 여지없이 허물어졌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불과 사나흘 사이에 비슷한 사례가 한꺼번에 몇 건이 연달아 겹쳐 일어났습니다. 연말을 맞아 생리 현상이라도 도진 것일까요.평소 나름대로 감정을 조절하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흥분하는 취약점이 드러난 것입니다. 토론을 하더라도 차분하게 생각을 얘기하면 되는데 자기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게 결정적인 흠입니다. 아무래도 소견이 좁은 탓이겠지요. 물론 상대방에 대해 큰 결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 스스로의 자괴감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다행스럽게도 엊그제 저녁 친구들끼리의 다른 모임은 시종 웃고 떠들면서 대화가 진행됐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서도 국정교과서 문제가 거론됐다면 사정은 또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술자리에서는 정치와 종교 얘기는 꺼내지 말라는 것이 무슨 연유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애꿎은 연예인들의 스캔들이나 프리미어 야구 얘기로만 끝낼 수도 없는 것이 딱한 노릇이지만 말입니다.그런 점에서는 술잔을 들 때마다 돌아가며 외치는 건배사가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날의 으뜸 건배사는 ‘빠삐따또’였습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또 만나자”는 뜻입니다. 사회적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는 요즘 같은 세태에 풍미를 더하는 덕담입니다. ‘껄껄껄’ 건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사랑할걸, 좀 더 즐길걸, 좀 더 웃을걸”이라는 뜻이라지요. ‘너나 잘해’라는 건배사도 써먹을 만합니다. 시빗조로 들리지만 “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해서”라는 뜻이라니, 엄청난 반전입니다.이제 달력에 마지막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을미년(乙未年)의 12월도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백화점과 쇼핑센터에는 눈꽃 장식의 점멸등이 등장했고 구세군 자선냄비의 딸랑거리는 방울소리도 거리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로 온몸을 감싼 채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세상이 험해지고 스산해질수록 스스로 차분해지려고 애씁니다.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들었던 건배사를 외쳐봅니다. ‘인생은 안단테!, 사랑은 비바체!’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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