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인 듯 '노자' 아닌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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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인 듯 '노자' 아닌

2015.11.24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지난 2일자에 쓴, 노자에 대한 제 글을 읽은 분으로부터 어느 분야나 ‘무림의 고수’들이 있는 법이거늘 감히 무람없이 입을 놀렸다는 투의 힐난을 받았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맞아 노자의 무위자연을 떠올리며 쓴 제 글이 그렇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다만 그분의 생각이 나와 다르구나 하고 마음의 별 동요 없이 넘겼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었던 8명 가운데 지인도 있었지만 초면이 대부분인 데다 제 글을 핀잔한 그분도 그날 처음 만났습니다. 일단 활자화된 글은 독자들의 몫이니만큼 칭찬에도 비난에도 들뜨지 않는 훈련은 되어 있는 편이라 기분이 나쁘거나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무림의 고수’란 표현에서 노자에 대한 본인의 이해가, 어쭙잖은 저의 그것보다 월등하다는 뜻으로 들렸고, 그러니 속된 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세탁기 앞에서 빨래하냐.”는 빈정거림인데, 그분의 그러한 태도는 노자 말씀과는 사뭇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 노자를 안다면 저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아는 ‘노자’였기에 그분의 ‘지적질’이 놀라웠던 것입니다.

오강남의 <도덕경>에는 도를 아는 사람은 머뭇거림, 주춤거림, 어려워함, 맺힘이 없음, 소박함, 트임 등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도인은 예의 바른 교양인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이기에 보기에 뭔가 어색하고 모자란 듯 보이며 어느 한 가지만을 딱 부러지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열린 마음 때문에 “글쎄요.”하는 정도로만 대답 하니 끊고 맺는 데가 없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나사가 좀 풀린 사람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저는 그중 어떠한 모습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분 자신의 생각처럼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고, 흰 것을 지탱하며 검은 것을 인정하는, 영광을 취하면서 오욕의 자리에도 설 수 있는 양가적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런저런 분별이나 타박을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노자를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노자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실은 ‘노자를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한 도덕경 1장의 말씀처럼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도 똑같이 그분을 ‘지적질’하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것도 7, 8명의 밥상 머리가 아닌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공중에 흩어져 버리는 말이 아닌 영원히 남게 될 글로 하고 있으니 저는 더 한심하고 악질적인 ‘반노자, 비노자’적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 이른바 식자들의 ‘앎’ 앞에 매복되어 있는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정토회를 이끄는 법륜 스님은 ‘즉문즉설’을 통해 ‘밀착법문, 맞춤설법’을 전하며 ‘지혜의 지식화’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지식화’란 흔한 말로 ‘머리로만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으로 얻어지며 지혜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에서 얻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를 지식화한다면 ‘덜어냄을 쌓아두는 것’이니 그 자체로 뒤죽박죽일뿐더러 막상 실생활에 적용하면 바로 오작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그분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알아서, 알려고 해서 탈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식과 지혜를 혼동해서 큰일입니다. 쌓아야 할 것과 덜어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함에도 모두 쌓아두려고 하는 것에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도 현실의 삶은 도무지 변화되지 않고 죄다 과녁을 빗나가 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노자'를 아는 것을 두고 '무림의 고수' 운운하는 것이 바로 '지식적 노자'에 갇혀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그래서 노자도 도덕경 78장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겠지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는 것, 세상 사람 모르는 이 없지만 실천하지 못한다.”고.

“지식은 가깝고 지혜는 멀다.”고 해야 할까요? 하물며 노자는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해서는 지혜라는 말로도 부족해 ‘명(明)’이라고 했습니다. 명이란 그대로,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통찰적으로 환하고 밝게 보이는 것이지요. 마치 깜깜한 방에 전깃불을 켜는 순간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가는 것처럼요. 결국 자기를 제대로 알면 다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수행과 수련은 ‘자기 알기’에 궁극 지점이 있듯이요.

그때 그분, 면전에서 제 글에 싫은 소리를 했지만 제가 샐쭉하지 않았듯이 오늘 제 글에도 고까워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날 그분의 말씀 속에서 제가 배울 것을 갈무리했습니다. 하나의 '지혜' 경험이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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