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부산의 변화상

일제 수탈 시설이었던 부산항 

일제·미군 주둔지 하야리아  

나란히 부산 시민의 품으로…  

한적한 어촌서 상전벽해 해운대  

첨단도시·휴양지로 명성 높아 

번영의 뿌듯함 뒤편,

눈물과 압제의 역사 잊지 않기를…


출처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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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속에 기억은 희미해지고, 사람도 스러진다. 대신 공간은 역사를 품은 채 남는다. 공간을 통해 우리의 지난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부산의 대표적 공간들을 선정해 광복 이후의 변화상을 비교하고자 자료사진과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은 성장과 번영을 마냥 자랑스러워 하기보다, 눈물과 압제의 역사를 잊지 말라고 조용히 웅변한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일왕이 항복선언을 한 이후 귀환선을 타고 돌아온 동포들이 마주한 해방 조국의 첫 관문은 부산항(북항)이었다. 


일제 강점기 부산항은 일본의 대륙진출 교두보이자 수탈의 빨판이었다. 징용과 징병, 위안부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들의 눈물이 부산항을 적셨다. 경부선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옮겨진 물자가 부산항에서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갔다. 


하지만 뻘에서도 꽃은 피듯,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 근대 도시 부산은 급성장한다. 해방 직전까지 부산항은 1~4부두와 중앙부두 매립 공사가 이뤄져 급증하는 물류 수송을 감당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 기간 임시수도 역할을 맡으며, 부산항 일대 중심가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 행정의 일번지로 자리매김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 물류산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부산항은 2000년대 부산신항에 항구 기능을 넘겨준다. 


2015년 현재, 컨테이너에 내어줬던 공간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는 재개발 1단계 부지조성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시민공원도 부산항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농경지였던 부산시민공원 땅에는 1930년 일본인들의 위락시설인 경마장이 들어섰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인 이후 이 곳은 70여 년 동안 일본에서 미국으로 사용자가 바뀔 뿐 사실상 시민들은 발붙일 수 없는 군사시설이 된다. 


일제는 이곳을 기마부대와 병참경비대 주둔지, 임시군속훈련소로 활용했고, 해방 이후 잠시 제2 경마장을 설치하기도 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2006년까지 캠프 하야리아 미군 주둔지로 쓰였다. 


1995년 '우리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가 결성된 지 20년 후인 2014년 부산시민공원으로 돌아온다. 


오늘날 첨단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해운대는 1945년은 물론 1960년대까지도 한적한 어촌이었다. 일제의 군용 비행장으로 조성된 수영비행장 터는 센텀시티로 이름을 바꾸고 초고층 빌딩들이 마천루 경쟁을 벌이는 공간이 되었다. 2011년부터 아시아인의 영화축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의전당에서 열리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해운대해수욕장은 해마다 여름이면 전국 최대 휴양지로 명성을 날린다. 

부산일보 지역이슈팀=손영신·이호진·이자영 기자 issu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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