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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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남녀가 유별하거늘

2015.05.11


5월 9일 끝난 제 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본 영화 ‘화장실의 피에타’가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경쟁부문에서 상을 받진 못했지만 세 번 상영을 할 때마다 마쓰나가 다이시(松永大司) 감독과 배우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했고, 팬들이 주연배우 노다 요지로(野田洋次郞)를 에워싸고 사인 공세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림에 인생을 건 미술학도 히로시는 위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으며 살아갑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여름에 화장실의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립니다. 당돌하고 반항적인 여고생이 그의 삶에 끼어들고, 히로시는 그 학생에게서 힘을 얻어 홀린 듯 전력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예술은 인간을 무의미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라는데,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작품 자체보다 거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히로시는 영화에서 화장실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누구나 정화(淨化)와 황홀을 느끼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연기한 배우 노다는 “촬영 전엔 몰랐는데 데즈카 오사무(手塚治) 선생이 ‘화장실 안에는 우주가 있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아톰을 창조해낸 사람입니다. 죽기 전 그의 일기에 ‘오늘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면서 암 선고를 받은 환자가 무엇 하나 하지 않고 죽기는 싫다는 듯 입원실의 화장실에 천장화를 그린다는 아이디어를 적어 놓았답니다. 영화는 그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된 작품입니다. 

화장실은 그만큼 중요한 공간입니다. 누구나 이용해야 하고 아무도 외면할 수 없는 필수 생활시설이며 공중도덕의 척도가 되는 장소입니다. 문화시민운동중앙협의회, 한국화장실협회, 화장실문화시민연대와 같은 단체들이 청결한 화장실, 친절한 화장실 운동을 벌이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청결과 배려를 촉구하기 위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고 써 놓은 곳이 많습니다. 변기에 앉아서 잘 읽을 수 있게 ‘저를 깨끗이 하시면 오늘 본 것을 평생 비밀로 하겠습니다’라고 써 놓은 박물관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결 강화가 아닙니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은 화장실을 비판하려는 게 글의 취지입니다. 어버이날 저녁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 음식점은 남녀가 같은 화장실에 들어가게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성용 소변기는 없고 얇은 칸막이로 구분된 좌변기 두 개에 각각 남녀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불편하고 남자들은 민망합니다. 

남녀가 좌변기 하나를 함께 쓰게 한 곳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이렇게 남녀가 한곳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놓은 음식점들이 아주 많습니다. 공공기관이나 지하철과 같은 곳은 남녀가 구분돼 불편하지 않지만 맛집으로 소문나 손님이 늘 붐비는 오래된 업소들도 태반이 남녀 구분이 돼 있지 않습니다. 종로의 한 대중음식점은 남녀가 한 공간을 이용하게 돼 있습니다. 게다가 문간 가까이 소변기 2개를 너무 바짝 붙여 놓아 제대로 서서 소변보기도 불편할 만큼 비좁고 오가는 사람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어떤 화장실은 ‘남녀 화장실을 분리하지 못했습니다. 정 소리가 신경 쓰이는 분은 리코더를 연주하세요.’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응가하는 소리가 밖에 안 들리게 리코더를 불라는 말인데, 애국가를 불어야 되나 아니면 '날 좀 보소'를 불어야 되나 ‘구경 한번 와보세요’라고 하는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불어야 하나? 연주를 하느라 응가가 잘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리코더가 선뜻 입을 댈 수 있을 만큼 깨끗할 리도 없습니다.

또 어떤 화장실은 ‘만약 휴지가 떨어지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 꽹과리를 쳐주시기 바랍니다’라며 꽹과리를 하나 걸어 놓았던데, 무슨 동네잔치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도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곳은 논현동에 있는 어떤 일식집입니다. 어쩌다 그곳에서 세 번 식사를 했는데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종업원들도 친절합니다. 객실이 스무 개 남짓 되니 꽤 큰 음식점입니다. 그런데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곳은 서울시가 선정한 우수접객업소라고 돼 있습니다. 화장실이 그따위인데 뭐가 우수 접객업소입니까? 무슨 행정을 어떻게 하기에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화장실에 성 구분이 없는 곳, 화장실 입구에 성 구분이 없는 곳이 우수업소가 돼서는 안 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할리우드 시는 올해 1월 성 중립 화장실(Gender neutral restroom) 설치를 의무화했습니다. 성전환자,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등 성 소수자들을 위한 조치입니다. 이 화장실에는 남성용 소변기가 없고 용변을 보거나 샤워를 하는 별도 공간이 마련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도 같은 이유에서 이미 지난해 10월 남녀 구분이 없는 화장실을 확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야말로 아직 남의 나라 일이며 다른 주제로 다룰 사안입니다. 객실 하나만 줄여도 화장실을 증설하고 성별 이용이 가능하게 할 수 있을 텐데, 대부분의 업소들은 손님들이 돈 내고 먹는 것에만 신경 쓸 뿐입니다. 손님들이 잘 먹기 위해 또는 잘 먹어서 배설하고, 손을 씻거나  용모를 가다듬게 할 수 있는 공간을 늘리는 데는 무관심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11월 남녀 구분도 없고 칸막이도 없이 변기 3개만 설치한 전남 신안의 장애인 화장실이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폐쇄된 일이 있습니다. 장애인 화장실에는 특히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시민운동 단체들도 내용이 늘 똑같은 화장실 청결이나 개방운동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화장실 인권 증진과 성별 배려운동을 해주기 바랍니다. 화장실은 남녀가 유별해야 합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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