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이 높다 하되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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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 하되

2015.04.17


옛 시조집을 들추던 중 선현의 ‘근엄한’ 가르침을 현재의 시대상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은 ‘삐딱한’ 관점으로 패러디해보자는 것이지요. 우선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陽士彦, 1517~1584)의 시조입니다. 우리 시조를 거론할 때면 제1과 제1장에 나오는 글이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는 하는 일이 잘 안 된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일단 시도하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권면가(勸勉歌)로 자주 인용됩니다. 현대그룹을 일군 고 정주영(1915~2001) 회장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생전에 정 회장은 지시한 사업 프로젝트에 대하여 임직원들이 부적합성을 보고하면 이렇게 말하며 질책하곤 했다는군요. “임자, 해보기는 했어?”

시조의 함의에 요즘의 사회 현실을 대입해 보죠. 단군 조선 이래 최고 스펙을 가졌다는 청년들이 제대로 된 직장을 찾기 힘들고 대학 등록금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 형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업 희망생 중에는 인턴 경력 한 줄을 쓰기 위해 ‘열정 페이’라는 허울 아래 저임금을 감수하거나, 학점을 이수하고도 졸업을 미루는 'NG(No Graduation)족‘도 증가 추세라고 하는군요. 

젊은이의 범위를 30대로 확대하여도 일부를 제하면 공유하는 바닥 정서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고도성장 이면의 후유증이랄까, 사회 개혁의 중심 세력이나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되지 못한 채 별 다른 희망도 목표도 없이 ‘88세대’로 ‘삼포세대’로 내몰리는 느낌말이에요. 라디오 방송에서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철 지난 유행가를 듣는데 웃음이 나오려다 말았습니다. 대신 눈물이 돌아 안경이 흐려지더군요. 

가사 내용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던 세계는 넓고’, 투지만만한 70년대 개발도상국 청년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제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성세대뿐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도 다 안답니다. 요즘 개천에는 새끼 드래곤은커녕 도롱뇽 알[卵]도 없어요.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외침은 연전 코미디 프로인 ‘개콘(개그콘서트)’에 나왔던 “안 될 놈은 안 돼!”일 거예요. 이어지는 후렴구는 “쇼 미 더 머니!"

다시 양사언의 시조로 돌아옵니다. 이 시조를 요즘의 10대, 20대 젊은이들에게 소개한다면 어떤 뜨악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요.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더 쓰다’고 자조하는 청소년들의 대답은 시큰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헐!” “뭔 말인데?” “그래서 어쨌다고?” 

어찌 됐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어쩌구저쩌구’를 현대 감각으로 풀어 쓰면 한마디로 ‘스펙을 쌓아라’입니다. 스펙을 쌓아도 별 볼일 없는 도돌이표 아이러니를 어쩔 거냐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지요? 넋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스펙이라도 안 쌓으면 또 어쩔 건데?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외국어대 독어과 졸업. KAL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역임.
한국수필(2008, 수필) 신인상 . 시와문화(2011, 문화평론)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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