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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과 도쿄에도 없는데 서울에 있었네
2015.03.13
“……서울에서는 베이징과 도쿄, 방콕과 상하이에도 없는 전보(Telegraph), 전화(Telephon), 전차(elektrische Strassenbahn) 및 전기조명(elektrische Beleuchtung)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1901년 한국을 찾은 한 독일 여행가의 기록입니다. 이 글을 읽는데 문득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 明成皇后弑害事件),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 1909년의 안중근 의거(安重根義擧),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1919년의 삼일운동(三一運動), 1945년의 광복(光復) 같은 한일 근현대사 관련 키워드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근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한 서점의 서가를 둘러보고 있는데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동경 대학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태학사, 2005)라는 긴 제목의 책이 필자의 눈에 띄었습니다. 책의 부제는 ‘메이지 일본의 한국 침략사’였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선 왕조의 몰락을 다룬 역사 자료를 읽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의 권위자로 잘 알려진 학자인지라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저자는 일본 대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그리고 일본 대학생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 책을 구입한 필자는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읽었습니다. 강의록 형태의 그 책은 읽는 기쁨이 매우 컸습니다.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은 ‘황제가 서명하지 않은 병합 조약’이므로 불법이라는 사실을 역사 자료를 근거로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저자의 강의를 들은 일본 학생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질문에는 부정 또는 반박보다 놀라워하는 기색이 한층 더 역력했습니다.그 책에서 필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내용은 ‘경복궁 안에 설치한 최초의 전기 시설’ 이야기를 담은 꼭지였습니다. “1887년에 건청궁(乾淸宮) …… 점등한 것”(1888년 고종황제실록의 기록)과 더불어 “……서울에 전차가 달린 것은 동경보다 3년 먼저였습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新문명기의 대명사인 전기 및 전차를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종황제가 능동적으로 조선에 유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그때까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전기 시설, 전차 시설, 철도 시설 모두가 일본 강점기의 유산쯤인 것으로 지레짐작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소개한 서울의 전차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1900년 초 조선을 다녀간 한 독일 여행가의 기록을 인용한 구절이었습니다.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줄로 여겼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국민이 서구 신발명품을 거침없이 받아들여 서울 시내 초가집 사이를 누비며 바람을 쫓는 속도로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할 수 있다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그 책의 저자가 인용한 문헌은 《겐테의 여행기(Genthes Reisen)》(1905)였습니다. (*註: 원문에는 ‘아침이 신선한 나라’)그 구절을 읽으며 필자는 당시 독일인이 서울 거리의 전차를 직접 체험하면서 남긴 여행기에는 뭔가 더욱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 원저(原著)를 구해 정독하고픈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오래전 절판된 원저 《Korea-Reiseschilderung(코리아-여행기)》(Siegfried Genthe, 1905)가 다행스럽게도 한국학을 전공한 독일인 학자 Sylvia Braesel 교수(Erfurt 대학, 1992~1996 연세대학교 방문교수)에 의해 독일에서 2005년 복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덕분에 필자는 1901년 조선 땅을 밟았던 원저자 겐테 씨와 조금 더 폭넓은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널리스트이자 여행기 작가(Reiseschriftsteller), 지리학자(Geograph)인 겐테(1870~1904)가 당시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을 방문하고 남긴 여행기는 지금도 편견 없고 공정한 역사적 기록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한 예로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서방 기자들이 조선을 직접 방문하지도 않고 도쿄나 베이징에 머물며 주워들은 것을 기사화해 자기 나라로 보내는 추태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겐테는 제물포(Tschmulpo)를 통해 조선 땅을 직접 밟았습니다. 자신의 저서에서 그는 조선(朝鮮)을 ‘고요한 나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아침이 신선한 나라(Land der Morgenfrische)’라고 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금강산(Diamantberge)의 장안사(Tschanganssa)를 다녀왔고 제주도(Insel Tschedschu)의 한라산(Halassan)정상까지도 올라갔습니다. (註:한라산에 오른 최초의 외국인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황제를 알현(謁見)한 상세한 인상기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서울에서는 베이징과 도쿄, 방콕과 상하이에도 없는 전보, 전화, 전차 및 전기조명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구절이 오랫동안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1 세기 사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桑田碧海)’는 말처럼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그러했듯 얼마나 많은 사람이 ‘1901년의 전기, 전차 역사 이야기’를 올바로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라도 그것들이 일제 강점기의 유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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