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도청 광장 울려 퍼진 여대생의 마지막 '방송'
여대생 박영순씨…34년만에 확인 '관심'
기념재단,
시민 희생·헌혈 동참·항쟁 참여 알린 시민군 방송활동 조사
1980년 5월 24일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황종건 기자가 전남도청 옥상에서 찍은 장면.
정문 오른쪽에 수위실이 보인다. 동아일보DB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오고 있으니 도청으로 와주십시오. 도청 내에 총을 소지하고 계신 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에 총을 쏘아서는 안 됩니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직전 이뤄진 '마지막 새벽방송'의 주인공이 당시 여대생이었던 박영순(55·여)씨로 확인되면서 마지막 방송의 실제 내용과 당시 상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4일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5·18 마지막 방송은 27일 새벽 가두가 아닌 전남도청 1층 방송실에서 이뤄졌으며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광주시내에 울려 퍼졌다. 기념재단이 조사한 재판 기록 및 박씨와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종배 전 국회의원, 이흥철씨 등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한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7일 새벽 2시께 전남도청 1층 방송실. 박씨는 김씨가 작성한 쪽지 형태의 원고를 건네받은 뒤 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인적이 드문 거리를 돌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등 감성 어린 문구는 없었다. 박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계엄군이 몰려 오고 있는 상황과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에 먼저 총을 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3차례 이상 힘주어 전달했다. 10∼15분쯤 지났을 무렵,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방송은 중단됐고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박씨와 함께 있던 이흥철씨, 신원미상의 여중생 등 3명은 방송실에서 바로 연행돼 상무대에 끌려가 취조당했고 박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6개월을 복역한 후 석방됐다. 기념재단은 '방송반'을 구성해 조직적인 선동활동을 했다는 계엄군의 주장과는 달리 방송활동은 특별한 명칭이나 조직체계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차량에 탑승해 확성기나 메가폰 등으로 가두방송을 하며 헌혈과 항쟁동참을 촉구했으며 도청 내 방송실에서도 사망자 소식 등 도청 상황실 접수 내용이나 도청 앞 궐기대회 현황 등을 방송했다. 가두방송은 초기(5월 18∼21일)에는 전춘심, 차명숙 등이, 이후(5월 21∼26일)는 박영순, 이경희 등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나 이외에도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계엄군 철수 후 수습대책위원회가 활동했던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도청 내 방송은 김선옥 등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기념재단은 생존자 진술과 일부 언론 보도에서 서로 다른 주장이 제기되자 지난 6월부터 11월까지 생존자 구술과 당시 현장음성파일 분석, 군법회의 재판기록 등을 조사해 지난 3일 광주 YMCA에서 열린 '님을 위한 행진곡' 주제 학술세미나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기념재단은 27일 새벽 가두 방송을 했다거나 김선옥씨가 27일 마지막 방송을 하고 도청을 빠져나가 집으로 피신했다는 기존 주장은 계엄군 배치 상황상 불가능하며 26일까지 방송에 참여했던 김씨의 기억이 오랜 시간 탓에 일부 왜곡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념재단은 앞으로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시민들이 소장한 5·18 당시 사진, 영상, 음성 자료를 발굴하고 언론사와 함께 방송활동에 참여한 시민, 5·18 사진 속 주인공 찾기 등을 계속 전개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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