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가을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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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가을

2014.11.04


남산의 가을도 어느덧 절정입니다. 녹색의 여운을 배경으로 붉은색과 노란색이 배합을 이룬 산등성이의 정취는 그 자체로 계절의 선물입니다. 출퇴근하면서 일상적으로 가까이 바라보는 정경이지만 하루하루가 다른 모습입니다. 특히 지난 주말 후둑대는 빗줄기가 한 차례 스쳐지나간 뒤로 원색의 색감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불과 열흘 뒤면 단풍의 향연도 끝물이겠지요.

남산의 단풍은 서울 도심 가로수들의 그것과도 또 다릅니다. 색상의 선명도에서부터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뿌리에서 빨아올리는 노란색의 카로티노이드나 붉은색 안토시아닌 색소의 순도에서 차이가 난다고나 할까요. 그렇지 않더라도 자동차 배기가스에 숨구멍이 막힌 가로수 이파리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도심에서도 고궁의 단풍 정취가 한 수 위라면, 남산의 정취는 또 그 위에 있는 것일 테니까요.

같은 봉우리를 이룬 남산에서도 한강을 바라보는 남쪽 기슭과 도심을 향한 북쪽의 분위기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남쪽 사면은 소나무가 빽빽한 반면 북쪽은 오히려 활엽수가 많은 까닭입니다. 한쪽은 햇볕을 많이 받고, 반대쪽은 산그늘이 많이 진다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해마다 겨울철이 지나고도 북쪽 기슭에는 한동안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는 것이 같은 이유에서겠지요.

그런 때문인지 회현동의 케이블카 쪽에서 장충동 국립극장까지 이어지는 북쪽 순환로가 남산의 산책길 가운데서도 가을을 받아들이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입니다. 가슴을 젖히고 크게 숨을 쉬면서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남짓입니다. 굳이 운동화나 등산화로 갈아 신지 않아도, 넥타이를 풀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산책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게 됩니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입니다.

가을을 좀 더 가까이 느끼고 싶다면 포장도로의 산책로를 벗어나 흙길의 생태 탐방로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 길에서는 나무마다 단풍 색깔이 제각각임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물론이려니와 벚나무, 신갈나무, 아카시아, 오리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등등. 엽록소가 모두 빠져나간 탓에 탄닌 색소로만 칙칙한 갈색의 나뒹구는 낙엽에게서도 나름대로의 사연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도 산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 남산의 호젓한 정취를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때입니다. 순환로에 산책객들의 발걸음이 차츰 뜸해질 때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몇몇 산책객이 남아 있다면 대개는 낙엽을 쓸어가는 바람소리의 의미를 새기려는 사람들입니다. 무성했던 여름날의 수풀이 사위어지듯이 지나간 청춘의 기억도 불현듯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슴이 저밀수록 가을의 추억도 아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 단풍의 경치는 또 다른 경탄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감정의 절정은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붉은 노을의 흔적과 함께 빠르게 어둠 속으로 젖어드는 산록의 그늘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그리움의 심연을 느끼게 될 것이니까요.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도 동심원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거의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두 뺨을 타고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남산의 가을 풍경에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은 3호터널 입구에서 남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우리은행 본점의 대형 글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빛깔 고운 단풍잎 하나/ 그대에게 보내 드립니다.” 조현자 시인의 ‘가을 편지’ 마지막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려 했으나 끝내 한마디도 쓰지 못한 채 단풍잎으로 인사를 보낸다는 내용입니다. 이 한 구절의 표현만으로도 가을의 운치를 보태주기에 충분합니다.

남산의 가을이 점차 깊어가면서 서울타워의 첨탑이나 케이블카의 모습도 한결 정겹게 다가옵니다. 설사 가슴 시리지 않더라도 위로받고 싶고, 또 위로해 주고 싶은 계절입니다. 누구라도 언젠가는 바람 따라 흩날리는 하나의 낙엽일 테니까요. 이 짧은 가을날, 조현자 시인의 표현처럼 남산은 온통 사랑과 그리움의 속삭임으로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냈다. '법이 서야 나라가 선다',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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