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는 서글퍼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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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는 서글퍼

2014.10.22


열흘쯤 전에 결혼식 주례를 또 섰습니다. 2005년 가을에 어쩌다가 주례로 데뷔한 이래 벌써 스무 번째입니다. 주로 친구의 아들 딸 결혼을 주례했지만, 대학 선배의 요청에 한마디 사절도 하지 못하고 맡은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주례가 갑자기 없어져서 그러니(이유는 잊었음) 대신 좀 해 주라는 친구의 부탁에 생판 모르는 남녀의 결혼을 주례한 일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실 때입니다. 골프장과 관계된 사업을 하는 녀석이 골프 이야기를 꺼내기에 솜씨는 엉망이지만 나도 할 말(주로 골프 농담)은 많아서 즐겁게 한참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몇 월 몇 일에 약속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골프를 치자는 말인 줄 알고 좋아서 별 약속 없다고 했더니 지 아들 주례 좀 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꼼짝 못하고 걸려든 사례도 있습니다.

형과 동생을 다 주례한 경우도 두 번 있습니다. “나 말고 누구 없니, 왜 자꾸 날 시키냐?”고 했더니 “지난번에 잘 못했으니까 이번엔 잘 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하기야 형은 주례를 서 주고 동생은 안 해 준다는 것도 이상해서 또 맡게 됐습니다.

주례를 맡으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게 됩니다. 결혼식 날까지 아무 탈이 없도록 매사 조심해야 합니다. 남들 앞에 서서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거룩한 말씀’을 하는 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뻔뻔스럽게 말도 잘 하고 농담까지 하고 있지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결혼식 날까지 내내 고심을 하게 됩니다. 형에게 해 준 말을 동생에게 그대로 해 줄 수도 없습니다.

나는 신랑신부를 결혼식 1주일이나 열흘쯤 전에 미리 만나 취재를 하곤 합니다. 이들이 대체 어떤 남녀이며 어떻게 사귀어 왔는지,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은지, 신문기자들이 흔히 하는 말대로 이 결혼의 ‘야마’가 뭔지 인터뷰를 통해 감을 잡고 이를 바탕으로 주례사를 씁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맞춤형 주례사’라고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1시간 이상 만나 밥 먹고 술 마시며 이야기를 했는데도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엔 주례사를 쓰는 게 정말 힘들어집니다. “만당(滿堂)하신 하객 여러분”이나 “결혼은 이성지합(二姓之合)이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이런 판에 박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해 주랴? 나는 주문생산도 하는 사람이다.”라고 물어본 적도 있습니다.

주례사를 글로 쓰지 않고 말로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글로 써서 낭독해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고심해서 쓴 주례사를 읽으면 말로 하는 것과 달리 분위기가 진지하고 숙연해집니다. 그런데 이번에 주례를 할 때는 식장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런지 영 분위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뒷좌석의 하객들이 계속 떠들기에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다 또 시끄러워지기에 “떠들 사람들은 나가라”고 일갈했더니 그제야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은 결혼식 이후에 벌어집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곤욕스럽기도 한 일입니다. 어떤 혼주는 예식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돈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짓이지? 나를 전문 주례꾼으로 아는 거야 뭐야?’하는 생각에서 뿌리치다가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던 신랑 작은아버지의 간곡한 청에 마지못해 받았습니다. 기분 참 더러웠습니다.

예식 직후 다른 친구를 시켜 봉투를 건넨 혼주도 있습니다. ‘내가 이걸 왜 간접적으로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봉투 받기를 거절한 이유를 그는 한참 지나서야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본인은 쑥스러워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더 씁쓸한 것은 신혼부부가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연락이 없는 경우입니다.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서로 날짜가 맞지 않은 부부가 있었는데, 바쁘게 사느라 그런지 그 뒤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랑의 아버지가 자식들을 나무래 1년이 더 지나서 아기도 낳은 뒤에야 함께 만났습니다. 그나마 약속시간에 한참 늦은 사람이 있어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기념촬영을 할 때 주례에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에게 고개를 기울여라, 웃어라 어쩌고 하는 사진사들은 신랑과 신부 사이에 겨우 얼굴 하나 들이민 주례는 사진이 어떻게 나오거나 관심도 없습니다. 더욱이 신랑 신부들은 주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럴 거면 왜 사진을 함께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들어간 결혼사진을 받아본 경우는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선배의 말을 본받아 주례사에‘주사부일체’라는 말을 넣은 일이 있습니다. “주례는 선생님 아버님과 같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이런 말이 있다는 걸 알아두어라”고 농담을 한 건데, 요즘 세상에 주사부일체를 실천하는 신혼부부가 있겠습니까? 대학 은사의 주례로 결혼한 사람들이 매년 선생님의 생일에 함께 만나는 부부모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문자나 메일로라도 명절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한 부부가 한 번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결혼 후 주례에게 어떻게 인사를 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의 경우 술 좋아한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술만 자꾸 갖다 줍니다. 권문세가나 부잣집 결혼과는 인연이 없어 큰돈을 받은 적도 없지만 나는 현금이나 상품권이 좋은데(현금 싫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몸에 해로운(!) 술만 생기니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술이 상하고 변하는 건 아니지만 막말로 선물 받은 술을 재활용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선물 받은 걸 선물한 경험이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돈만 돌고 도는 게 아니라 술도 돌고 돕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 신랑신부가 뭘 들고 인사를 하러 올 건지 생각하게 되는 것도 정말 피곤하고 싫은 일입니다. 한 번도 주례를 해보지 않은 분들도 많을 텐데 이런 ‘사치스러운 푸념’을 늘어놓아 미안/죄송합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내가 주례를 한 부부 중에서 헤어지거나 잘못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했더니 내 말을 잘 이행하기 위해 쌍둥이를 낳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처음 주례를 선 부부입니다.

어쨌든 나는 한 달 전에 약속한 12월 예식까지만 맡고 '주례업계’에서 이만 은퇴할까 합니다. 10년 가까이 주례를 했으면 할 만큼 한 셈이니까요. 물러갈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던데, 서글프고 찝찝하고 속 끓이는 일을 뭐하러 계속한단 말입니까? 요즘은 주례 없이 흥겹고 의미 있게 결혼식을 잘 치르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한국일보 논설고문, 자유칼럼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꾸지나무 (뽕나무과)  Broussonetia papyrifera (L.) Vent.

선유도를 지나 무녀봉에 올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눈 시리게 푸른 바다를 보며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서니 온몸이 파랗게 물이 든 기분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무녀도 둘레길에서 만난 붉은 열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꽃처럼 유난히 눈길을 끄는 꾸지나무 열매였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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