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와의 전쟁: 그 내키지 않은 결말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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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와의 전쟁: 그 내키지 않은 결말

2014.07.31


노루를 보호동물로 보느냐, 아니면 유해동물로 보느냐를 놓고 농민들과 환경단체들이 논란을 벌여오던 중, 제주도 당국은 작년부터 노루를 유해동물로 선포하고 노루의 포획이나 사살을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제주도 전체로 농가에 피해를 주지 않을 적정 수준의 노루 개체 수는 3천 정도임에 비해 실제 개체 수가 2만이 넘어 노루들이 먹을 것이 모자라 농가로 침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책은 농가 피해를 막기 위한 하나의 고육지책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실제 포획 또는 사살된 노루가 수백 두밖에 안 되어 노루 피해 방지책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가별로 개별적으로 노루와의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은 해발 250미터의 산중이라 노루가 어린 나무들을 공격하러 오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는 셈입니다. 노루는 연약해 보여도 높이 그리고 빨리 뛸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루가 침입하지 못하게 집 마당 주위에 2미터 높이로 노루 망을 쳤지만 노루는 또한 영리한 동물이라 어디로든 틈을 비집거나 담을 넘어서 들어옵니다.

방어책 2단계로 나무에 비닐을 매달아 나풀거리게 하거나 허수아비를 세워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사다리, 쇠스랑, 갈고리와 같은 장애물을 나무 근처 곳곳에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장치들이 처음에는 대 노루 전(戰)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노루는 이 모든 장애물을 비웃는 듯 홀연히 나타나 매화 밭의 어린 나무 순들을 따먹고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조석으로 어스름을 틈타 혹은 한밤의 어둠을 택해 침입해 오는 노루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어 저와 아내는 나날이 안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매일 밤 밭쪽으로 나가 경계를 한 덕에 노루의 침입이 다소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입에 닿을 높이에 있는 매화 순들은 여지없이 따먹히고 심한 경우는 나무 자체의 생명이 위협받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을 맞아 더 이상 노루와의 전쟁이 일방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없다는 전망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대 노루 전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다른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느냐로 고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루와의 전쟁으로 우리가 지쳐 있을 즈음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매화 순을 따먹고 꽃밭을 짓밟는 노루는 밉지만 길에서 만나는 노루는 귀엽다. 우연히 노루를 만난 날은 괜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란 희망을 품어 왔다. 노루라는 동물도 천지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이 아닌가? 먹고 살자고 우리 집에 들어오는데 이걸 굳이 침입으로 보고 막지 못해 안달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화나무들이 노루에 시달리긴 해도 그새 이럭저럭 자라기도 했으니 노루가 계속 침입해 온다 해도 제법 자란 나무들은 생존의 위기를 넘어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어린 나무들까지 다 살리려고 더 이상 난리를 칠 필요가 있겠나? 노루가 와서 어린 순들을 먹더라도 생존할 나무들만 잘 키워 나가면 이 또한 상생이 아닐 것인가?’ 하면서 이제부터는 노루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참 편안하였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 할까요, 그런 고상한 경지에 가까이 온 기분이었습니다.

한번은 밤 산책 중에 손전등 불빛에 놀란 노루 두 마리가 사방 가리지 않고 후닥닥 도망을 치는데 오히려 더 놀란 것은 추격자인 저였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잔돌을 주워 던지며 추격을 하니 노룬들 어찌하겠습니까. 담을 이루고 있는 촘촘한 바위들 사이에 온전히 빠졌다가 일어나 노루 망을 타 넘고 달아나긴 했는데 그 노루들은 아마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이후 우리 마당에 오는 것을 꺼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해보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엔 씁쓸함이 일었습니다.

아무튼 노루와의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려고 문을 열었더니 개 세 마리가 앞마당에 모여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기 때문에 야생견이라 생각하고 소리를 질러 쫓아버렸습니다.

개들이 부랴부랴 달아난 후 살펴보니 잔디밭에 노루 한 마리가 누워 있었습니다. 개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은 것이지요. 가까이서 살펴보니 제법 큰 암노루였는데 목 부분이 깨물렸는지 목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노루가 바깥에서 추격을 당해 우리 마당으로 도망쳐 왔다가 힘에 부친 나머지 결국 물려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도 핏자국은 한 점도 없었습니다.

노루의 사체는 옆 농장의 주인이자 그 개들의 주인이기도 한 이웃에게 부탁하여 농장 주위의 빈터에 묻도록 했습니다. 겨울 노루라면 딱히 묻지 않고 ‘자가소비(自家消費)’를 하여도 무방하게 돼 있지만 여름 노루는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합니다. 그 이웃은 노루 피해를 많이 입은 분이라 노루의 생태에 대해 비교적 잘 아는 편이었는데 그에 의하면 집에서 노루가 이렇게 개에게 물려 죽으면 노루들이 한동안 더 이상 침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이 노루와의 전쟁의 종말이라면 차라리 이런 종말이 없었더라도 괜찮았을걸,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겨우 상생으로 풀어간다는 생각에 이르렀는데 이런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니 착잡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아직까지 노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하여 오래 계속돼 온 노루와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제주 소재 유엔국제훈련센터(UNITAR)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외국인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외국인거주환경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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