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불행한 글자가 없게 [임철순]

 


이 세상에 불행한 글자가 없게
2021.11.16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은 태어나면서부터 질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47세로 타계한 조선 숙종~영조 때의 문인입니다. 자는 석여(錫汝)ㆍ보여(寶汝), 호는 동계(東谿)이며 19세에 생원이 됐으나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을 잠시 지내고, 공조좌랑 태인(泰仁) 현감 등에 임명됐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뛰어난 문장가로 기억되는 그의 자취는 사후에 ‘동계집(東谿集)’으로 남았습니다.

최근 그의 평전(송혁기 지음 ‘나만이 알아주는 나’)을 읽었습니다. 동계의 글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노자는 말했지. ‘나를 아는 자가 드물면 나는 귀해진다’고. 아아, 이 조귀명 한 사람을 아는 자 세상에 드물구나.” 이 말 그대로 주자학에 매몰된 사람들은 노자 장자는 물론 불교에도 밝았던 그를 이단시했고, 그는 병과 고독 속에서 참신하고 독창적인 글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조귀명의 글씨. 29세 때인 1721년, 할아버지의 서간첩을 정리한 경위를 밝힌 글이다.

 

 


탈주자학적 문예의식으로 자기만의 문장을 발전시켰던 그의 진면목을 잘 알게 해주는 것은 아래와 같은 편지입니다. “천고의 학술과 문장이 모두 나에게 맞지 않는다면 차라리 내 학술을 학술로 삼고 내 문장을 문장으로 삼아서 별도의 가치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종횡무진 내달려 천하의 후세로 하여금 유자도 아니고 불자도 아니며 한유(韓愈)도 아니고 유종원(柳宗元)도 아닌, 우뚝하게 홀로 선 간천자가 있었음을 알게 할 뿐입니다.” 간천자(乾川子)는 조귀명 자신입니다.

그의 많은 글 가운데서도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마시에 급제한 조카 조재우(趙載遇, 1709~1762)에게 써준 자설(字說)입니다. 자설은 원래 관례(冠禮)를 행할 때 자를 지어주면서 격려하는 글인데, 이 경우는 이미 쓰고 있는 이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내용입니다. 조재우의 자 회지(會之)는 충신 악비(岳飛, 1103~1141)를 죽게 한 중국 남송 때의 간신 진회(秦檜, 1090~1155)와 같았습니다. 주변에서 놀리고 말이 많자 조재우는 동계에게 어찌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동계는 딱 잘라서 “자를 굳이 바꾸려 하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순처럼 본받을 만한 옛사람을 따르라고 한다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위축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걸(傑)이나 도척(盜跖)처럼 악한 사람을 경계하라고 하면 다들 분연한 마음으로 기꺼이 하려 한다, 그러니 진회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회지라는 자를 갖고 살면서 늘 ‘내가 진회 같아서야 되겠는가’라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옛 회지와 같은 일은 끊어버리고 다른 일을 실행하려 힘쓴다면 ’회지‘를 더 이상 ’옛 회지‘가 아니게 만들 수 있다.”

동계는 이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글자도 세상에 널리 사용되다보면 행과 불행을 가지게 된다네. ’옛 회지‘가 있는 바람에 ’회지‘ 두 글자가 더러운 치욕을 당한 지도 오래되었지. 만약 ’지금 회지‘를 얻어 더러움을 씻어준다면 ’회지‘의 행이 될 뿐만 아니라 ’회지‘ 두 글자의 행이기도 한 셈이네. 걸과 도척의 악을 씻어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걸과 도척이라는 이름을 주는 것이 마땅하네. 그렇게 함으로써 천하에 불행한 글자가 없게 해야 할 걸세[使天下遂無不幸之字].”

 

 


이런 생각은 이름보다 실질이 중요함을 강조한 그의 글 ‘왜려설(倭驢說, 왜당나귀 이야기)’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대구 사람 하생(河生)이 말을 타고 서울에 갔습니다. 사람들이 말이 잘 달리는 걸 보고 궁금해하자 장난삼아 왜관(倭館)에서 산 왜당나귀라면서 값을 부풀려 말했더니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생이 사실대로 말해 주자 모두 속았다고 분해하거나 부끄러워했고, 아무도 그 말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계는 이렇게 썼습니다. “말은 실제로 잘 달리면 타는 것이지 어찌 반드시 왜당나귀여야 하겠는가?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린다는 사실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왜당나귀라는 이름만으로 그것을 산다면 진실로 잘못된 것이네. 그러나 왜당나귀가 아님을 확인하고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리는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버린다면 더욱 소견이 좁은 것이지.” 동계는 “조(趙)나라의 수레몰이꾼이 왕량(王良, 수레를 잘 몰았다는 춘추시대 사람)의 이름을 취하고, 노(魯)나라의 의원이 편작(扁鵲)의 명성을 빌렸다고 당시 사람들이 그들에게 세상을 속였다고 하지 않았다네. 그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야.”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름보다 실질이 중요하고,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살펴봅니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이름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완(完)은 완전하고 온전하며 결함이나 부족이 없다,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용(用)은 쓰다, 베풀다, 행하다이니 두 글자의 결합 자체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됨으로써 두 글자를 불행하게 했고, 글자를 망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글씨도 잘 썼지만 오늘날 누가 그의 서예를 알아주고 있습니까?

4개월도 남지 않은 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들의 이름을 살펴봅니다. 민주당 후보 이재명(李在明)은 이름이 좋습니다. 명(明, 밝을 명)은 노자가 말한 견소왈명(見小曰明), 사소한 걸 보고도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낼 수 있는 통찰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겸청즉명(兼聽則明),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 현명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반대는 편협한 말만 들으면 어리석어진다는 편신즉암(偏信則暗)입니다.

요즘은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명철보신(明哲保身, 이치에 밝고 분별력이 있어 자신을 잘 보전함)에도 명(明)이 들어 있습니다. 명명백백하고 공명정대하게 살아가야 마땅한 이름입니다. 이재명(1887~1910)은 1909년 12월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체포돼 사형당한 애국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국민의힘 윤석열(尹錫悅) 후보의 이름에서는 열(悅, 기쁠 열)이 고갱이입니다. 근열원래(近悅遠來), 즉 근자열원자래(近者悅遠者來)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뜻으로, 열(悅)이 들어간 대표적 성어입니다. 정치의 요체가 이 말에 오롯이 함축돼 있습니다. 또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은 벗이 잘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담긴 말입니다. 열인찬자 백사개위(悅人讚者 百事皆僞), ‘남의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은 온갖 일이 모두 거짓됨’이라는 소학(小學)의 가르침도 삶의 경구로 삼을 만한 말입니다. 윤석열도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온통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높은 후보들뿐인 이번 20대 대선에서는 그동안 이름의 의미대로 살아오지 않은 후보가 있습니다. 저마다 나라를 경영하겠다고 나선 대선 후보들이지만 집권하면 그 이름에 값할 정도로 일을 잘 할는지 궁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세종대왕은 없는 글자도 만들었는데, 한글이든 한문이든 우리는 있는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있는 글자를 이렇게 엮고 저렇게 묶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시인이나 작가의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은 있는 글자, 주어진 이름만이라도 제대로 의미가 드러나게 하고 아름답게 가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은 나라와 공동체의 몫이지만, 이 세상에 불행한 글자가 없게 하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 각자의 몫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데일리임팩트 주필,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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