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비자금 관행 [정달호]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비자금 관행

2021.11.05

 

대장동 개발 비리와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가운데 서민들의 허탈감과 절망감이 극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규모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은 할 말을 잊고 검경의 수사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울 뿐입니다. 유사한 비리 사례가 자꾸 나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탁한지를 새삼 일깨워 줍니다. 공정과 정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런 엄청난 '토건 비리' 외에도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를 정직과 신뢰라는 공동체의 기본적인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비자금 관행입니다. 기업의 비자금 외에 공공기관의 씀씀이에도 비자금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꽤 오래전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전직 대통령의 죄목에는 특수활동비 불법 수수(收受)가 들어 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횡령을 하거나 유용을 한 게 아니라 국정원에서 준 돈을 받아 임의로 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기관인 국정원의 장들은 그 돈을 주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특수활동비라는 그야말로 특수한 돈이 자리 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오랜 관행이었을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또 다른 권력기관인 검찰에서도 격려금 명목으로 특수활동비를 썼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으며 사회적 물의(物議)를 빚은 고위직 당사자들은 직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정보기관이든 수사기관이든, 다른 어떤 기관이든 본연의 업무를 위한 것이라면 일반적인 업무추진비를 쓰면 되는데 왜 별도 예산으로 특수활동비라는 것을 만들어 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보나 수사를 담당하는 권력기관뿐 아니라 여타의 정부기관에서도 특수활동비를 쓸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국회나 말 못할 특별한 용처에 임의로 쓰이는 돈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수활동비라는 용어부터가 모호하고 맹랑합니다. 특수한 활동에 쓰이는 돈인데 무엇이 특수한 활동인지 납세자가 바로 알기 어렵습니다. 특수한 용처에 쓰이므로 일반인뿐만 아니라 그 기관의 다른 직원도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며, 나아가 나중에 감사를 받는 것도 아니어서 참으로 맹랑한 자금이라 하겠습니다. 공적인 용처가 특수해서라기보다는 그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임의로 쓸 수 있도록 돼 있어서 특수활동비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 돈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용처를 물어본다면 기밀 유지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열린 사회(Open Society)'를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세금을 어디에 쓰는지를 납세자가 몰라도 된다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국가가 쓰는 돈은 다 국민의 세금에서 나옵니다. 민주사회에서 정부의 예산 책정과 집행은 투명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고 어디에 썼는지도 모르는 그런 돈을 운용한다는 것은 납세자를 기만하고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처사입니다. 요즘 세상에 무슨 기밀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용처를 정말로 기밀로 할 필요가 있다면 쓰고 나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 미래 어느 시점에서라도 집행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투명성은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특수활동비에는 이런 견제나 감시 장치가 없습니다

 

 

이런 특수활동비라면 기업의 비자금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상당 부분의 기업 범죄는 비자금 조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관계 로비를 목적으로 하든 총수 일가의 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비자금은 누가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기록도 없는 그야말로 눈먼 돈입니다. 비자금이 많은 기업일수록 부실한 기업일 개연성이 큽니다. 비자금 사건이 터진 다음 그 기업을 해부해 보면 이제나저제나 망할 기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묘하게 비자금을 관리하려면 매우 유능한 인재가 이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그러면 진짜 중요한 일에 쓸 인재가 부족해집니다. 또 비자금을 숨기고 속이려면 지속적으로 속임수를 써야 하니 기업의 일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업 운영도 투명하지 않으면 비즈니스를 잘해 나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선진국의 정부 예산에는 우리와 같은 특수활동비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대테러 첩보활동과 같은 국가안보에 직결된, 그야말로 비밀리에 추진되는 업무에 쓰이는 돈일 것입니다. 그런 돈도 회계책임을 벗어날 수 없도록 일정한 규정 속에서 집행될 것이라 봅니다. 선진국이란 공개성, 투명성, 책임성과 같은 민주적 가치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말하기 때문이죠.

 

투명하지 않은 돈이 있으면 이 돈을 임의로 사용할 방도를 찾는 데에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쓸 필요도 없는 돈을 다 소진해야 하니 얼마나 머리를 짜내야 하겠습니까. 비자금과 부패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런 비자금이 많으면 관리들이 부패하게 되고 부패한 환경에서는 일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만연하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계에 녹이 슬면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최근 LH 등 공공기관의 대규모 내부자 투기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철저한 투명성의 예로, 우리 언론에도 수차 보도된 스웨덴 공무원들의 출장비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일단의 스웨덴 국회의원들이 우리나라에 출장을 왔는데 이곳저곳에서 대접을 받다 보니 출장비가 남았습니다. 이들은 돌아가서 출장지에서 쓴 돈에 대한 영수증을 제시하고 쓰지 않은 돈은 다 반납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공무원들에게 출장비를 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 썼든 남았든 일단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그 사람의 용돈이 되는 것이죠.

 

국민 세금의 사용에 있어 이런 허술한 관행이 유지된다면 공무원들이 주머니에 들어올 돈에 신경 쓰느라 일을 제대로 안 하게 될 것입니다. 특수활동비든 경상경비든 운용에 투명성과 공개성과 책임성이 있도록 해야 사회가 맑아집니다. 임의로 쓸 수 있는 비자금과 같은 검은돈이 없는 맑은 사회가 돼야 공직자든 기업인이든 모두 할 일을 제대로 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