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화장실 이야기 [이성낙]

 

 

남기고 싶은 화장실 이야기

2021.11.04

 

1988년 초, 신년 인사차 고(故) 방우영(1928~2016) 회장을 조선일보사 회장실로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문제가 크게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필자가 “국가적 행사인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커서 이처럼 사회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방 회장은 제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필자는 “현시점에서 새로운 공중화장실을 확보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충분치 않고, 예산이 있다 하여도 화장실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부지 확보도 어렵고 설령 부지를 확보한다 해도 지역주민의 민원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해결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서울올림픽을 맞아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나 많은 외국인 방문객이 서울을 찾을 텐데 그들이 이용할 공중화장실이 없다면 대단히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해결책으로 시내 큰 빌딩의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면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필자의 생각을 묵묵히 듣고 있던 방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사회부 부장’을 불렀습니다. 사회부장이 오자, 방 회장은 제 생각을 다시 한 번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필자는 거듭 서울 시내 빌딩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방안을 언급하였습니다. 며칠 후  조선일보에는 신용석 사회부장의 데스크 칼럼 ‘올림픽 화장실’이 실렸습니다(1988.1.21). 뒤이어, 시내 대형빌딩의 화장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96년 무렵, 필자가 재직하던 아주대학교 의료원장실로 심재덕(沈載德, 1939~2009, 재임 1995~2002) 수원시장이 찾아왔습니다. 차향을 즐기며 잠시 환담하다가, 심재덕 시장이 뜬금없이 “혹시 수원시 행정에 개선할 사항이나 시 행정에 참고될 사안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국내 화장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심 시장은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메모지에 무엇인가 적었습니다.

 

 

2~3년 후, 수원시가 공중화장실 개선사업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전국적으로 ‘공중화장실 미화 캠페인’이 전개된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캠페인이 가져온 뚜렷한 변화 중 하나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의 놀랍고 ‘우아한' 탈바꿈입니다. 심재덕 시장은 해마다 전국적으로 ‘아름다운 화장실 경연대회’를 열어 국내 화장실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나아가, 심 시장은 세계화장실협회(World Toilet Association)를 창립하고 인류의 보건 위생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수원 집터에 해우재(解憂齋)박물관을 건립했습니다. 청결하고 깔끔한 화장실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을 느끼게 됩니다. 심 시장은 그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약하다가 2009년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공중화장실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것입니다. 선진국의 공중화장실이 ‘희귀 시설’임을 통감하고 나면, 우리의 공중화장실이 얼마나 멋지고, 수적으로도 많은지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조선일보의 김태훈 논설위원이 우리의 주거환경 가운데  “한강의 기적이 화장실에서도 이뤄진 셈이다.[조선일보 '만물상', <경복궁 수세식 화장실> (2021.7.12.)] ”라고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기적을  ‘공중화장실’에서 이룩해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사회의 힘, 순발력과 결집력을 보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조선일보에서 시작된 ‘작은 생각’이 심재덕 전 시장의 화장실 환경개선 사업으로 이어지며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제, 우리의 화장실 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하며 본보기로 삼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위생 선진국’으로 크게 도약한 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에서 당연시된 청결하고도 멋진 공중화장실이 뒷받침하여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의 한 모서리인 ‘뒷간’이 밝고 아름다움을 발하는 곳으로 변모한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니 우리의 화장실 문화가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남기고 싶은 당당한 역사의 일편(一片)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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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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