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사전아, ‘돈쭐’도 올려라[정숭호]

   

 

옥스퍼드 사전아, ‘돈쭐’도 올려라

2021.10.20

 

‘돈쭐’은 한국 젊은이들-MZ세대라고 불리는- 사이에 정착한 ‘착한’ 유행어’입니다. 2019년 7월 뉴스에 처음 나왔으니 생겨난 지 3년쯤 됐겠네요. '돈쭐내자'에는 착하고 정의로운 일을 한 가게의 음식이나 물건을 팔아줘 가게 사장님을 “돈으로 혼내주자”라는 ‘예쁜’ 뜻이 담겼습니다. “혼쭐을 내주겠다”는 상대방을 협박하고 겁주는 말이지만 “돈쭐을 내주겠다”는 “사장님, 이제 큰일 났다. 돈 버느라 혼이 나갈 거다"라는 뜻입니다. “사장님이 하는 일을 본받고 싶지만 사정이 그러하지 못해 돈으로 후원하겠으니 받아달라”는 게 ‘돈쭐내기’입니다.

 

나는 지난달 ‘대박’ ‘누나’ ‘언니’ ‘오빠’ ‘만화’ ‘먹방’ 등 한국어 스물여섯 개를 새로 등재한 옥스퍼드영어사전(OED)이 돈쭐을 빼놓은 게 아쉽기만 합니다. 이번에 올라간 단어들도 커지고 달라진 한국의 이모저모를 세계만방에 알리기에 부족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착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것을 사랑하고, 불행에 빠진 이웃을 도우려는 한국인의 심성이 단 두 글자에 넘치도록 들어 있다는 점에서 돈쭐이 한국어를 대표할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감이 부정적 느낌을 주는 데다 폭력성도 비치고, 혼쭐내는 사람과 혼쭐나는 사람의 상하관계에서 비민주성까지 드러나는 ‘혼쭐’을 자음 하나 고쳐 정반대의 뜻을 지닌, 착한 단어로 만들어낸 한국 젊은이들의 재치, 거기에 담긴 역설(逆說)의 유머 …, 이런 것들까지 생각하면 돈쭐이 지금 이 시대 한국인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돈쭐내기’는 선행을 하는 가게(주로 자영업)를 알게 된 사람이 SNS에 그 선행을 소개하고, “우리 이 가게에 돈쭐내러 갑시다”라고 한 줄 써 놓는 걸로 시작됩니다. 가게가 가까운 곳이면 직접 찾아가서 팔아주지만 멀리 있는 사람은 배달로 주문하고, 배달 가능한 거리보다 더 멀리

 

선한영향력가게 홈페이지.

 

있는 사람들은 그냥 돈을 보내 그 사장님을 돈쭐냅니다. 어떤 사장님은 그냥 받은 돈은 자신이 노력한 대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기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보내기도 한답니다.

 

 

돈쭐이 난 사장님 가운데는 이런 분도 있더군요. 서울 중랑구에서 마카롱 가게를 하는 가녀린 모습의 사장님인데, 가게를 열기 전에는 병원에서 일했던 이 사장님은 코로나19로 의료진이 모자란다는 뉴스를 보고 자원봉사를 지원했답니다. 당국은 즉각 그에게 바로 이튿날 경북의 한 병원으로 가주면 좋겠다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는 “가게 하는 내 사정도 봐주세요. 하루나 이틀 정리한 뒤에 가면 안 되나요”라는 말은 입속에 꾹 눌러놓고는 가게 문에다 “여차여차해서 당분간 문을 닫게 됐습니다”라는 메모를 붙이고 떠났습니다. 헛걸음할 손님들에게 자기 나름 양해를 구한 거지요.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마치고 8주 만에 올라온 그는 “단골도 다 끊겼겠구나” 걱정하면서 가게 문을 다시 열었는데 웬걸, 손님이 전보다 두 배가 늘었다는 겁니다. 그가 코로나19 자원봉사를 떠난 것을 안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돈쭐을 냈던 겁니다.

 

돈쭐을 이야기했으니 ‘선한영향력가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서울 마포구 상수동 ‘진짜 파스타’ 사장은 올해 서른여섯인 오인태 씨입니다. 그는 2019년 초 정부가 결식아동에게 지급하는 아동급식카드 가맹점으로 등록하려다가 일반 결제 단말기(포스)가 아닌 별도의 단말기가 필요한 데다 추후 정산도 복잡해 가맹점 등록을 포기하고 대신 급식카드를 가지고 온 아이에게는 돈을 안 받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가게에 남루하고 지친 행색의 어린 형제가 왔는데, 형이 피자 먹고 싶다는 동생 손을 잡고 먼 길을 몇 시간이나 타박타박 걸어온 걸 알게 된 오 씨는 자기의 선한 마음이 오히려 애들을 고생시켰다고 후회합니다. “이건 나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 그는 ‘선한영향력가게’라는 사회운동을 시작합니다.

 

 

‘선한영향력가게’에 가입한 가게는 “급식카드가 있는 어린이는 무료로 상품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스티커를 문이나 유리창에 붙이게 됩니다. 홈페이지에도 업종과 위치, 서비스 시간 등이 소개됩니다. 아이들이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많지만 안경가게, 학용품가게도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찾아봤더니 선한영향력가게가 2,500개가 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

 

선한영향력가게들은 아이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들어올 때 눈치 보면 혼난다’ 같은 글이 쓰여 있는 ‘선한’ 안내문도 붙여두고 있다.

 

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거지요. 하지만 선한영향력 가게의 숫자와 위치는 들쑥날쑥, 왔다 갔다 합니다. 코로나19와 깊은 불경기로 인해 문 닫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얼마 전에는 꽤 여러 개가 있었는데 조금 전에 검색해보니 걸어서 40분 거리에 순댓국집 하나만 남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돈쭐내기는 이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와 코로나19가 가져온 불경기로 타격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 서로 돕는 거네요. 취업과 결혼과 내 집 마련의 꿈이 가로막힌 젊은이들과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상이 아무리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 하는 아수라판이어도, 서로 희망과 꿈을 주고받으며 이대로 당하지 말고 망하지 말자는 의지를 다지는 게 돈쭐내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MZ세대가 말하는 기성세대,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는 분들 가운데 이 선하고 아름다운 돈쭐내기에 참여하시는 분이 이미 많겠지만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해 그들의 희망을 더 환하게 밝혀주시고 선한 사장님들이 업에 대한 걱정을 덜 하도록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대갈등이 세대통합으로 승화되고, 그 결과 ‘돈쭐’은 반드시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오르게 될 겁니다. 그다음에는 ‘선한영향력가게’도 올라가겠지요.

 

대한국민 여러분,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오를 때까지 우리 모두 “돈쭐내러 갑시다!!!” “옥스퍼드 사전아, 돈쭐도 올려라!!”를 외칩시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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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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