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반지(斑指)[박종진]

 

 

세 개의 반지(斑指)

2021.10.14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이면서 권위, 충성을 상징하는 그 반지 맞습니다. 갑자기 웬 반지 타령이냐고요? 만년필에도 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년필 뚜껑을 보면 금속으로 한 바퀴 돌린 것을 만년필 세계에서는 캡밴드(cap band) 또는 캡링(cap ring) 이라고 부릅니다. 갖고 계신 만년필이 있다면 함 꺼내보세요. 못 찾겠다고요?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한 개가 아니고 두세 개 된다고요? 그런 것도 있습니다. 값을 꽤 주고 사셨다면 반지는 반드시 있을 겁니다. 선물 받았는데 뚜껑에 반지가 없다고요? 그렇다고 실망하진 마십시오. 예외는 늘 있고 그 만년필이 명작(名作)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지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만년필의 황금기가 열리는 1920년대부터입니다. 그 전까지 각 회사들은 돈을 더 받기 위해서 금이나 은 또는 진주조개와 전복껍데기를 잘라 장식(裝飾)을 했습니다.

 

파커51 (초기산은 캡링의 흔적이 있었지만 나중 것은 사진처럼 캡링이 없다.)

 

정말 아름다운 만년필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회사들의 개성은 없었습니다. 꽤나 긴 기간인 약 40년 동안 “아 저건 정말 특별하다.” 하는 것은 다섯 개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서로 비슷했습니다.

 

반지의 특별함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파커였습니다. 1921년에 파커가 출시한 듀오폴드(Duofold)는 여러모로 특별한 펜이었습니다. 빨강의 몸체에 검정색을 위와 아래로 배치, 만년필 세계에 컬러시대를 열기도 했지만 맨 처음 것은 뭔가 허전했습니다. 1923년 파커는 ‘골드거들(Gold Girdle)’이라 이름 짓고 반지 하나를 뚜껑에 끼웠습니다. 이것은 기막히게 어울렸고 듀오폴드는 비로소 완벽해졌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파커가 반지를 가장 먼저 끼운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반지는 초창기부터 있었고 파커가 그 중요성을 맨 처음 인식했다는 것이지요. 이름 있는 반지의 처음입니다.

 

(좌) 1920년대 초 파커 듀오폴드 광고 (No Cap Ring) (우) 1920년대 중반 파커 듀오폴드 광고(One Cap Ring)

 

이 첫 번째 반지는 1928년까지 유행했습니다. 유행했다는 것은 파커는 물론 파커의 둘도 없는 경쟁자였던 셰퍼, 당시 가장 큰 만년필 회사인 워터맨도 반지 한 줄은 기본으로 끼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1928년에 두 줄 반지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파커와 에버샵의 최고급 신제품은 반지가 더 많았습니다. 이것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명 ‘데코밴드(Deco Band)’라 불리는 에버샵의 반지였습니다. 데코밴드는 가운데가 굵고 위와 아래는 가늘었는데, 가운데에는 그리스 열쇠(Greek Key)라 불리는 문양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이 반지가 제가 찾은 두 번째의 반지로 모든 아름다운 반지의 시작입니다.

 

1928년 에버샵 카탈로그 (Deco Band)

 

첫 번째와 두 번째 반지가 미국에서 등장했다면 세 번째 반지는 독일에서 나왔습니다. 만년필 사업이 미국에 비해 늦었던 독일은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개발된 것을 가져다 쓰기 급급했지만 1920년대 후반이 되면 그 격차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1913년 등장한 레버필러는 독일에서는 약 10년이 지난 1920년대 초반에 등장하고, 1924년 미국에서 대유행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재질의 만년필은 4년 후 독일에서 생산되고, 심지어 1929년 펠리칸이 만년필을 만들며 내놓은 잉크충전방식은 미국보다 2년이나 빠르기까지 합니다. 캡에 있는 반지 역시 마찬가지여서 두 줄 반지가 미국에서 1928년 유행하면 1년 후면 독일 만년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1937년 몽블랑은 최고급 라인인 마이스터스튁 129를 출시하는데 이 만년필은 세 줄의 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애버샵의 데코밴드처럼 위와 아래는 가늘고 가운데가 굵은 반지였지만 가운데가 살짝 돋으라져 있고, 그곳엔 문양 대신에 '몽블랑 마이스터스튁(MONTBLANC-MEISTERSTUECK)'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 독특한 시도는 독일 몽블랑이 처음 이었습니다. 1938년 후속인 마이스터스튁 139로 이어졌고, 1940년대 말 마이스터스튁 140시리즈를 거쳐 약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반지입니다.

 

1992년 몽블랑 작가 시리즈 한정판 헤밍웨이의 마이스터스튁 캡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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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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