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으면 위험한 보도(步道)[허찬국]

 

 

젖으면 위험한 보도(步道)
2021.10.12

5년 전쯤 무릎 부상으로 깁스나 보호대를 차고 목발에 의지해 집에서 가까운 직장을 한 보름 동안 걸어 출퇴근했던 적이 있습니다. 눈 날리는 바람 찬 1월 여의도 보도에서 넘어지며 옛날 군복무 시절 듣고 배웠던 거친 욕을 복습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목발이 낯설어 거북이걸음을 했으나 조금 익숙해져 보행 속도를 올리자 높이가 다른 보도불록에 목발이 걸리거나 경계석에 미끄러져 넘어지며 ‘이제 평생 불구가 되나 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젖은 보도 경계석에 발이 미끌할 때 식은땀과 함께 그때가 떠오릅니다.

이런 개인사를 꺼내는 것은 담당 공무원들에 대한 개인적인 유감 때문만은 아닙니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추세, 그리고 낙상이 제일 큰 노인 안전사고라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의미심장합니다.

고령화 추세는 추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2025년에 전체 인구 5명당 1명이, 2035년에 인구 3명당 1명이 65세가 넘는 초고령 사회가 됩니다. 이 연령층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본인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일 뿐 아니라 핵가족 시대 간병 문제, 늘어가는 의료보험 부담과 직결됩니다.

 



2019년 한국소비자원이 고령자 안전사고 추이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인 사람의 안전사고 중 ‘미끄러짐·넘어짐’ 등 낙상사고가 절반을 넘습니다. 사고 발생 장소는 주택이 60%가 넘지만 도로 및 인도도 약 4%에 이릅니다. 주택 내에서 발생하는 사고에도 회장실·욕실에서 미끄러지는 경우의 비중이 높습니다. 안전사고를 유발하는 품목으로는 ‘바닥재’가 1위인데 젖은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가장 흔한 유형일 듯합니다.

노인 낙상사고 중 미끄러워 넘어지는 비중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3년마다 조사해서 발표하는 노인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낙상 이유 중 ‘바닥이 미끄러워서’ 비중이 2017년 26%에서 2020년에는 30%로 높아졌습니다. 그 외에도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응답자 중 가장 활동적인 연령층인 65~69세가 전체 중 거의 반을 차지하는 것을 감안하면 실내뿐 아니라 실외 활동 중 낙상한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자료는 ‘고령자는 사고발생 시 중상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회복기간도 길어 사전예방'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예방을 위해서는 ‘균형감각 향상 및 근력강화를 위해 규칙적으로 운동’하라고 처방합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걸으려 나섰다가 미끄러져 넘어진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좌_사진1) 젖은 보도 경계석 (우_사진2) 서울 은평뉴타운에서 본 색다른 횡단보도에 접한 보도블록 모습. 흠이 파진 블록을 배치한 것이 신의 한 수다.   


보도 경계로 쓰이는 매끈하게 마무리된 화강석은 비에 젖거나 눈에 덮이면 상당히 미끄러워집니다 (사진 1). 목발 짚고 다닐 때, 또 그 이후 여러 번 겪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더 크고 매끄러운 석재 불록이나 큰 타일도 젖을 때 미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록이나 타일은 분포가 제한된 반면 경계석은 모든 보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상 자료를 보면 연중 3분의 1 이상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옵니다. 지난 10년 동안 매년 평균 108일 비가 왔고, 25일 눈이 내렸습니다. 3일 중 하루는 보도가 젖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비가 온다고 항상 기어다닐 수는 없습니다.

경계석의 매끄러운 표면을 없애는 것이 해결 방안입니다. 교체 시기가 된 곳은 표면에 흠이 있거나 일반 보도불록과 같이 표면이 거칠어 신발 바닥과 경계석 표면 사이에 수막이 생기는 것을 막아주는 것으로 대체하면 될 것입니다 (사진 2 참조). 교체를 하지 않더라도 표면에 흠을 파주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는 횡단보도마다 바닥에 ‘오른쪽을 보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좀 조잡하게 쓰여 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과 같이 우측이 아니라 좌측통행이어서 안전하게 차도를 건너려면 오른쪽에서 차가 오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죠. 보행자 안전을 미관보다 더 중요시하는 관행을 보여줍니다. 보행자, 특히 고령자의 낙상은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지고 치료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어 사회적 비용이 큽니다. 미끄러운 보도 경계석을 손질하면 횡단보도마다 대형 햇볕 그늘막을 설치하는 것 이상의 사회적 반대급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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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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