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 완벽하게 읽히는 글자 있다

 

   지금 당신이 보는 이 글은 돋움체로 쓰였다. 묵직하면서 굽은 곳이 없고 꾸밈이 거의 없는 깔끔한 글꼴이다. 흥미로운 정보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전달하려는 과학동아의 의도가 담겼다. 이처럼 모든 글꼴엔 ‘읽기 쉽도록’ ‘맛있어 보이도록’ ‘기억이 잘 나도록’과 같이 쓰는 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글꼴은 의도에 따라 독자의 눈과 뇌를 충실히 자극한다.

 

 

가독성 │ 읽기 좋다고 소문난 글자, 특정 조건에서만 통해

글자가 얼마나 쉽게 읽히는지는 글꼴학자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특히 획끝이 돌출된 세리프체와, 돌출이 없는 산세리프체를 비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글도 바탕체(명조)와 돋움체(고딕)가 자주 비교된다.

 

 

세리프체는 오랫동안 가독성이 좋은 서체의 대명사였다. 1980년 영국의 글꼴 디자이너 루아리 맥린은 저서에서 산세리프체가 세리프체보다 글자끼리의 유사도가 높아 글자를 오인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산세리프체는 글자들이 서로 잘 판별되는 특성인 ‘판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빙그레·우아한형제들·현대카드 제공

 

1988년 미국의 글꼴 디자이너 리차드 루빈스타인은 세리프가 글자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해 가독성을 높이는 반면 산세리프는 이런 정보가 없어 가독성이 낮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리프가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글자인지 판단하는 시간을 줄여 글자 읽는 속도를 높이고, 해독에 따른 피로도 낮춘다고 주장했다. 세리프가 다음 글자로 눈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하지만 가독성을 평가할 수 있는 과학적인 기준과 기술이 개발된 현재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2005년 미국 알린 알 고든 연구소 연구팀은 세리프의 유무와 크기에 따른 읽기 속도 차이를 실험했다. 짧은 시간 간격으로 여러 단어를 제시하고 읽기 능력을 평가하는 RSVP(신속 순차 시각 제시) 방법을 사용했다. 총 세 가지 크기를 비교했는데 세리프가 중간 크기일 때만 세리프체의 가독성이 산세리프체보다 약간 높았다. 세리프체는 글자 사이에 세리프의 공간을 확보하기 때문에 세리프의 크기가 커질수록 글자 사이의 간격이 산세리프체보다 넓어진다. 적당한 글자 간격은 가독성을 높인다. 

 

 

하지만 글자에서 세리프가 가장 클 때는 두 글꼴 사이의 가독성 차이가 없었다. 글자 간격이 일정 범위보다 넓어지면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중간 크기를 제외하면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의 가독성 차이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doi: 

 

오히려 산세리프체의 판독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2016년 터키 메르신대 컴퓨터교육및교육공학부 연구팀은 글자의 오탈자를 찾는 참가자들의 눈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은 세리프체를 읽을 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럼에도 정확도는 세리프체가 산세리프체보다 떨어졌다. doi: 10.1007/978-3-319-40355-7_55

 

(녹색) 산세리프(sans-serif)의 ‘sans’는 프랑스어로 ‘없다’라는 뜻이다. 산세리프체는 획 끝의 돌출된 형태인 세리프(serif)가 없고 시작부터 끝까지 굵기가 동일하다. (빨간색) 획 끝이 돌출돼 있는 세리프체는 가독성이 뛰어나다고 여겨져 전통적으로 서적과 인쇄물의 본문에 사용돼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의 가독성 우열을 명확히 가릴 수 없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동아사이언스DB

 

 

한글 서체의 가독성 연구결과는 일관된 결론이 없다. 첫 연구는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는 홍익대 석사학위 논문으로 ‘한글 타이포그라피의 가독성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글꼴의 종류, 크기, 간격 등을 달리하며 독서 속도를 쟀다. 그 결과 바탕체가 돋움체보다 6.7% 빨리 읽혔다. 본문용 서체에 바탕체가 안성맞춤이라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1990년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연구팀이 지면광고의 본문용 글꼴로 실험한 결과는 반대였다. 독자가 글을 읽는 속도는 돋움체가 바탕체보다 빨랐다. 본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해도 평가에서는 두 서체가 비슷했다.  

 

글자를 읽는 대상에 따라 바탕체와 돋움체 가독성의 우열이 바뀌기도 한다. 2003년 이희숙 당시 대구대 특수교육전공 연구원은 55명의 뇌성마비 학생을 대상으로 잘 읽히는 글꼴을 조사했다. 그 결과 돋움체와 샘물체의 가독성은 비슷한 수준으로 높았지만, 바탕체는 두 글꼴에 비해 가독성이 현저히 낮았다. 반면 정성원 서울과학기술대 나노IT디자인융합대학원 연구원이 65세 노인을 대상으로 한 2016년 실험에서는 모든 글자 크기 조건에서 바탕체가 돋움체보다 읽는 속도가 빨랐다. doi: 10.5392/JKCA.2016.16.11.661

 

박윤정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는 “한글의 영역에서 바탕체는 오랫동안 글자 세계를 지배해 왔다”며 “익숙함이 가독성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판독성 │ 찰나의 순간에 완벽하게 읽히는 글자는 있다

 

MIT 에이지랩 연구팀은 미국의 글꼴 디자인 회사 모노타입과 사람이 글자 정보를 인지하는 데 시간이 가장 적게 드는 글꼴을 연구했다.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글꼴을 차량 대시보드에 적용한 결과 판독 시간이 0.5초 가량 줄어들었다. MIT 에이지랩 제공

 

글자는 때때로 운명을 가른다. 운전 중인 도로 상황이 대표적인 예다. 혹여나 글자를 보고 잘못된 정보를 얻었다가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2012년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에이지랩(AgeLab) 연구팀은 미국의 글꼴 디자인 회사 모노타입과 인지하는 데 시간이 가장 적게 드는 글꼴에 대해 연구했다. 

 

알파벳 a나 c에서 열린 부분이 넓을수록, 알파벳 O와 숫자 0의 가로폭 비율 차이가 클수록, 글자 간격이 넓을수록 판독성이 높아졌다. 이런 요소들을 반영한 글꼴을 대시보드에 적용해 시뮬레이션으로 주행한 결과, 남성 운전자의 판독 시간을 0.5초 줄이는 데 성공했다. 대조군으로 사용한 고딕, 헬베티카 등의 글꼴보다 최대 12% 단축된 결과로 시속 80km로 주행하면 11m를 움직이는 시간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글꼴이 있다. 2010년부터 고속도로용 표지판과 도로명 표지판에 쓰이고 있는 ‘한길체’다. 글자 간격이 넓고, 글자와 여백의 비율을 비슷하게 설정했으며 ‘ㅇ’의 형태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등 눈에 잘 띄면서도 판독성이 뛰어나도록 디자인했다.

 

한글은 받침의 여부, 모음의 위치 등에 따라 글자의 형태가 달라진다. 한길체는 받침이 있을 때는 세로로 길어지는 탈네모틀 글꼴이다. 탈네모틀 한글이 네모틀 한글보다 판독성 또는 가독성이 좋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구본영 단국대 조형예술학과 연구원은 2010년 논문 ‘본문용 한글서체의 구조와 인지요인 상관성 연구’에서 “글자 하나하나가 아닌 전체 윤곽을 인지한다는 서양의 ‘단어윤곽인지론’에 따라 탈네모틀이 가독성이 높을 거라고 추측해왔지만 라틴어에서 만들어진 이론이 한글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읽기 속도, 정확도 등을 실험한 원경대 당시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연구원의 1990년 연구에서도 네모틀과 탈네모틀 사이에 가독성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 연구원은 논문에서 “익숙함의 차이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글 창제 이후 1900년대 후반까지 한글 글꼴 디자인은 거의 대부분 네모틀이었다. 

 

심미성│ 맛있어 보이게 만드는 글꼴

찰스 스펜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팀은 12종의 글꼴이 붙은 컵으로 맛을 연상하는 실험을 했다. 둥근 글꼴은 단맛을, 각진 글꼴은 신맛이나 짠맛, 쓴맛과 연관짓는 경향성이 나타났다. 찰스스펜스/옥스퍼드대 제공

 

 

글꼴은 소비자의 선택에 다양한 영향을 준다. 그중 하나가 음식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메뉴에 쓰여진 글꼴로 식당을 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뉴가 영어라면 기울어진 이탤릭체가 꽤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6년 미국 모건주립대 경영학부 연구팀이 직접 학생들에게 실험한 결과다. 학생들은 이탤릭체로 메뉴가 적혀진 식당을 더 고급스럽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감각이 맛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실험심리학자 찰스 스펜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글꼴과 맛의 상관관계도 밝혀냈다. 101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eat me’라는 똑같은 단어를 12종류의 글꼴로 제공했다. 내용물의 맛을 연상해보라는 질문에 둥근 글꼴은 달콤한 맛을, 각진 글꼴은 쓴맛이나 짠맛, 신맛과 연관 짓는 경향성이 나타났다. doi: 10.1177/2041669515593040

 

앵글리나 지머 스위스취리히연방공과대 환경적결정연구소 연구원은 가독성과의 연관성도 찾아냈다. 같은 와인을 마시더라도 가독성이 낮은 글꼴로 쓰여진 와인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 교수는 “글꼴의 삐침 하나에 따라서도 사람의 뇌는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삐침 하나로 상품의 성패가 결정될 수도 있다”며 “글꼴의 조형미에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박영경 기자

longfestival@donga.com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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