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갑(甲)오징어 게임이다[박상도]

 

 

다음은 갑(甲)오징어 게임이다

2021.10.01

 

사람 한 명의 목숨값이 1억 원, 참가자가 456명이니까 최후의 생존자는 456억 원을 거머쥐게 됩니다. 게임은 단순합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깡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그리고 ‘오징어 게임’입니다. 게임에서 지면 탈락인데 여기서 탈락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필자도 어렸을 때, 다 해 본 놀이였습니다. 그때는 졌다고 죽이지 않았는데 어른들이 돈을 걸고 게임을 하니까 지면 죽어야 하는 걸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물론 드라마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설정이 꽤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30년쯤 전에 이런 드라마가 나왔다면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 목숨을 담보로 돈을 놓고 하는 게임을 드라마로 만든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실제로 이 드라마를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2008년에 작품을 구상할 때만 해도 소재가 너무 낯설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합니다. 즉, ‘이 이야기가 먹힐까?’라는 고민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심의를 떠나 대중에게 소구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던 드라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참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456억이라는 돈은 목숨을 걸 만한 유혹이라는 것과 어차피 현실은 오징어 게임 속의 세상보다 더 지옥이라는 공감대가 극의 몰입을 쉽게 해주고 있습니다.

 

 

필자도 오징어 게임 8부작을 단숨에 시청했습니다.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 우리나라도 이제 이런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구나’ 였습니다. 물론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콘텐츠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유료 이용자에게 방영을 하는 거라서 규제가 느슨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같은 작품을 공중파에서 방송한다고 하면 “뭐 하는 짓이냐?”며 아마 난리가 났을 겁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세상이 얼마나 형편없이 망가졌길래, 이런 소재의 드라마가 성공하게 된 걸까?’였습니다. 물론 드라마의 성공 요인엔 배우의 명연기, 감독의 연출력, 탄탄한 대본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만, 문화할인율(Cutural Discount)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스토리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는 전 세계적으로 만연해있는 양극화의 심화가 크게 기여했다는 생각입니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나뉜 계층이 대를 이어 재생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재생산의 메커니즘에 지도층의 부조리와 윤리 불감증이 인내 수위를 벗어나고 있다는 데 절망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곽상도 의원 아들이 화천대유에서 받은 퇴직금 50억 원은 모든 뉴스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6년 근무한 대리의 퇴직금이 50억 원이라니요? 이게 문제가 되자 산재 보상금이라면서 적법하게 받은 돈이라고 합니다. 무슨 산수가 그 모양인지… 일하다가 사람이 산재로 사망해도 유족 보상 지급액이 평균 1억 몇 백만 원입니다. 자식들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아빠, 엄마 찬스를 쓰는 것에 넌더리가 났었는데, 50억 원 퇴직금을 당연한 듯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회 지도층들이 똥파리처럼 돈 냄새를 맡고 화천대유에 겹겹이 연루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망조가 들었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옵니다. 모두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니 자기는 물론 가족들까지 해쳐 드셔도 법망을 빠져나가겠지요. 아, 법 위에 계신 분들도 꽤 계신 것 같으니 불법의 소지가 있어도 법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또 생깁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돈 냄새를 어떻게 맡은 걸까요? 그리고 이런 일이 이번만 있었을까요?

 

검사는 검새가 됐고, 경찰은 오래전부터 짭새라 불렸습니다. 기자는 기레기에서 기더기로 한 단계 더 다운그레이드 됐고, 국회의원은 국개의원이라고 부릅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더듬어민주당, 국민의힘은 국민의짐이 됐습니다. 민심이 천심인데 하는 꼴을 보니 위기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입니다. “너희들이 백날 떠들어 봐라, 갑을 관계가 바뀌나.”라고 비아냥거리는 듯합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이강희 주간이 했던 대사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처럼, 그냥 놔두면 양은냄비 식듯이 조용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시정잡배와 같은 행태를 일삼고 있으니 존경심은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며 제 가족과 제 새끼만 챙기는 위선자들, 투기에 무너진 법조인의 양심,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래도 돼!”라고 생각하는 뻔뻔한 행태들을 보며, 오징어 게임의 다음 주인공들은 수억 원의 빚을 지고 벼랑 끝에 몰린 서민들이 아니라 윤리의식의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린 썩은 냄새 나는 지도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되겠지요? 그리고 제목도 바뀔 겁니다. ‘갑오징어 게임’이라고.

 

 

언론은 한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도 도구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듯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내편만 들어주는 사이비 언론을 바른 언론이라고 말을 하고 다닙니다. 바꾸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여든 야든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저 ‘관종’만 있는 듯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