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의 재조명..."그들은 사형이 집행됐다"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부정 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말한다.

 

제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총 유권자 수는 11,196,490명으로, 당선에 필요한 최소 득표수는 그 1/3인 3,732,164표였다. 유일 후보인 이승만 박사는 이를 너끈히 넘는 득표를 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4년 전에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회는 3월 18일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였으나, 부정 선거에 대한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국 다음날인 27일 대통령 당선자인 이승만은 사퇴하고, 5월 3일 국회에서 사퇴서를 정식으로 수리하면서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가 확정됐으며, 28일에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망함으로써 제5대 부통령 역시 재선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대법원에 제기돼있던 선거 무효 소송은 소송 대상이 둘 다 없어졌고 어차피 재선거가 확정된 터라 진행되지 않았다.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사망

(1960년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21],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의 3.15 부정선거는 임기를 마칠 가망이 없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4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진 이기붕은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이에는 이강석이 죽였는지 다른 누가 죽였는지 논란이 있다. 4.19혁명참고))

 

 

3.15 부정선거

 

부정선거 계획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었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 민생고가 심해진데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자유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두 차례에 걸친 무리한 개헌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하는 당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자유당은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주민들에게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은 또한 야당 참관인들을 갖은 핑계로 투표장에서 끌어내었으며,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 투표를 시행했다. 유권자들에게 투표 방법을 교육하는데 쓰겠다는 핑계로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모든 공작에는 경찰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에 야당과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며 호소하였지만, 자유당은 정치 깡패들로 하여금 폭력 소동을 일으키게 해 이들을 탄압했다. 이런 상황 속에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각각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부정선거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주열(金朱烈, 1944년 10월 7일 ~ 1960년 3월 15일)은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학생이다.

 

 

선거일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12]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시빅뉴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3.15 부정선거로 교수형이 집행됐다 트위터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위키백과

 

부정선거로 사형이 집행된 이정재 임화수   출처  https://blog.naver.com/park9p9/100032232340

 

 

1961년 12월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혁명재판소 공판에서 최인규와 한희석에게는 사형이, 이강학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1961년 7월과 11월 혁명검찰부는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들을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위반으로 공소를 제기하여 이정재, 임화수 등에게 사형, 신도환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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