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방 진 씨 아저씨와 딸 [추천시글]

 

 

시계방 진 씨 아저씨와 딸

2021.08.19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손목시계는 시계의 기능보다는 액세서리의 하나로 여기는 문화입니다. 핸드폰이 널리 퍼지기 전에는 손목시계는 실생활이나 결혼 예물에 필수품 같은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제가 살던 시골 면 소제지에도 시계방이 세 곳이나 있었습니다. 시계방 앞을 지나다 보면 사각형의 유리 진열장 안으로 시계를 고치고 있는 주인의 얼굴이 자주 보입니다. 까만 볼록렌즈를 오른쪽 눈에 끼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시계를 고치거나, 시계를 흔들어서 시곗바늘이 잘 움직이는지 귀에 대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보입니다.

 

세 군데의 시계방 중 제일 작은 시계방은 장터로 들어가는 길목 모퉁이에 있었습니다. 방 한 칸짜리에 일고여덟 평 남짓한 작은 집을 동네 사람들은 시계방이라기보다는 ‘하코방집’ 이라 불렀습니다.

 

 

하코방집에는 모두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시계방 아저씨와 아주머니, 저보다 한 살 어린 선자와 선숙이와 막내 선구가 가족이었습니다. 시계방 아저씨의 성은 면소재지에서 한 가구밖에 없는 진(陳)씨 였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진 씨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며, 빨갱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가끔 했습니다. 진 씨 아저씨가 동네 어른들 말씀처럼 빨갱이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시계방은 장사가 잘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큰 길가에 있는 시계방들은 밤이 늦도록 진열장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데, 진 씨네 시계방은 어둠이 내리면 캄캄한 시계방 앞에 적막한 바람만 서성거립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진 씨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진 씨가 시계는 제일 잘 고친다. 진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사람한테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고, 다른 시계방 사람들은 서울이나 대전에 있는 시계방에서 심부름이나 하던 사람들이다"하시며 폄하를 하셨습니다.

 

 

진 씨 아저씨는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부르시며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습니다.

그 시절의 풍습이 대개 그러하듯 진 씨가 놀러 오시면 저는 막걸리 심부름을 했습니다. 한 되짜리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라 부르는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를 사 왔습니다. 어느 때는 진 씨가 막걸리값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잊지 않고 심부름 값으로 1원짜리 동전을 주셨습니다.

 

1원이면 아이스케키를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이라 부르는 알사탕을 두 개 사면 두어 시간 정도는 단맛을 행복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진 씨는 막걸릿잔을 주고받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진 씨는 일본인 사장이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했을 때 홀어머니를 두고 갈 수가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홀어머니를 이북에 두고 혼자 남하한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일본인 사장을 따라 일본으로 갔어야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진 씨 아저씨네 갖다 드려라. 뭣 좀 주시려고 하면 절대 받아 오지 말고…”

진 씨와 아버지가 친하게 지내시다 보니 어머니는 가끔 음식이나 과일 같은 것을 싸서 제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진 씨 자식들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형제들끼리만 놀았습니다. 복숭아나 찐 고구마 같은 것,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 호박부침이나 부추전 같은 것을 들고 가면 컴컴한 방에서 놀고 있는 형제들이 반겼습니다.

 

장녀 선자는 키가 또래들보다 작았지만, 얼굴은 엄마를 닮아서 예뻤습니다. 남녀 성별을 가리며 놀던 시절이 아니라서 저를 보고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선자는 제가 가면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좁은 단칸방에 사는 처지가 부끄러워서 저하고 말을 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예쁜 선자하고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선자가 민망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항상 아쉬움을 안고 돌아섰습니다. 그나마 선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가버려서 너무 서운했습니다.

 

중학교 입학을 할 때 아버지께서 형과 저에게 손목시계를 한 개씩 사주셨습니다. 더불어서 하시는 말씀이 “팽년이가 있었으면 훨씬 좋은 것을 싸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고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팽년이는 진 씨의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선자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선자도 내년에는 중학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듬해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것처럼 장터에 겨울바람이 사납게 울부짖고 있는데 진 씨 아저씨가 불쑥 나타나셨습니다. 하꼬방집에 살 때는 늘 낡은 재킷차림이었는데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007 가방을 들고 오셨습니다.

진 씨는 지금은 시계방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007 가방에는 시계 끈이며, 유리 뚜껑, 크고 작은 톱니바퀴 등 시계부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시계방을 돌아다니며 시계부품을 팔고 있는데 여기 살 때보다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며 막걸릿잔을 기울였습니다.

 

 

“선자와 선숙이가 봉제 공장에 다니는 덕분에 사글셋방 신세는 면하고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

 

선자가 중학교에 다니지 않고 봉제 공장에 다닌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애들이 부산의 고무신 공장이나, 서울에 있는 가발공장에 다닌다는 말은 들었어도 봉제 공장은 무엇을 만드는 공장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신 이튿날 진 씨는 아버지께 손목시계를 선물하시겠다며 내놓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를 받으실 수 없다며 손을 저으셨습니다. ‘형님, 저도 이제 형님께 시계 하나 선물할 정도는 됩니다.’ 진 씨가 천 조각으로 손목시계를 능숙하게 닦으니까 빛이 번쩍번쩍 났습니다.

 

진 씨가 계속 시계를 내놓으시니까 아버지는 어머니께 이웃에 가서 돈을 빌려오시라 하셨습니다. 얼마간의 돈을 시계값으로 내놓으실 생각임을 눈치채신 진 씨는 급하게 가방을 들고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오후쯤에 친구로부터 봉제공장이 옷이나 인형 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또래들보다 키가 작은 선자가 종일 미싱을 밟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스라하게 아팠습니다.

 

선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 아버지께 진 씨네 서울 주소를 여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진 씨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이사를 가면 꼭 편지를 하겠다고 했으니 좀 기다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자라는 이름이 기억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진 씨의 편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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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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