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버린 사람들 [추천시글]

카테고리 없음|2021. 8. 10. 19:55

 

 

잊혀버린 사람들

2021.08.10

 

그들을 위해 싸웠으나 그들에게서는 잊힌 지 오래고, 맞서 싸운 자들에게는 끝없이 보복당하고… 그런 슬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 70년 북한 땅에 갇혀 광산 노예로 살아가는 6·25전쟁 국군 포로들입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1861년 미국 땅에서도 4년 동안 1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1864년 봄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는 더 이상 항전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북군 사령관 율리시즈 그랜트에게 항복 조건을 물었습니다. 그랜트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권총을 소지한 채 말 타고 떠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에 패한 남군은 아무런 제지 없이 그들의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남북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 후유증이 오래가긴 했지만.

 

 

우리도 최소한 남쪽에서는 남을 사람, 다른 나라로 떠날 사람 제외하고 북쪽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뒤 남쪽에서 간첩으로 활동하다 붙잡혔지만 죽어도 북쪽을 따르겠다는 사람조차 휠체어를 타고 북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8년 전 북쪽에 붙잡힌 국군 포로들은 지금까지도 노예로 학대받으며 살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전향한 사람 외에 억류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북쪽의 일관된 주장이긴 합니다. 북쪽이 없다 했으므로 남쪽은 돌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 꺼냈습니다. 북쪽은 감췄고, 남쪽은 잊은 듯 지내왔습니다. 아예 전사자로 처리되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치부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1994년 조창호 소위가 북한을 탈출, 43년 만에 귀환하면서 국군 포로들의 참상과 북한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던 64세의 노병이 거수경례로 귀환 신고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후에도 80명의 국군 포로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해 남한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실존하지 않는 유령처럼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국군 포로들의 실체가 잇달아 나타난 것입니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정전 당시 8만여 명의 국군 포로 가운데 5만~7만 명 정도가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또 북한 정권이 국군 포로들로 건설여단을 만들어 최북단 탄광 등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고 보고했습니다.

 

지난 2월 BBC 뉴스가 <북한, 한국군 포로들을 광산 노예로 삼다>라는 특집을 냈습니다. 북한 광산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지옥 같은 노예 생활의 실상을 공개한 것입니다. 북한 당국은 국군 포로들에게 결혼과 자녀 출산을 종용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2세들에게 광산 노예의 신분을 대물림토록 한 반인륜적 악행까지 보도되었습니다.

 

고무적인 일은 그 같은 북한 정권의 죄악상이 우리 법정에서도 마침내 인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법은 국군 포로 두 사람이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피고들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습니다. 법원은 또 승소한 이들의 요구대로 북한 저작권료를 관리하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 손해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압류금지채권임을 주장한 경문협 측의 항고를 기각했습니다.

 

경문협(이사장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현 대통령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2004년 북한 내각 산하 저작권사무국과 협약을 맺고, 그동안 조선중앙TV 등의 자료화면을 사용한 국내 방송사에서 저작권료를 징수해 약 8억 원을 북측에 송금했습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대북제재로 송금이 어려워지면서 현재 대략 20억 원의 저작권료가 법원에 공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경문협은 현재 국군 포로들에게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또 통일부(장관 이인영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북한 관영매체 저작권료에 대한 대북송금 경로와 북측 수령인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사실조회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공개할 경우 국가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가로막는 통일부, 경문협이 도대체 누구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어느 나라 조직인지 궁금합니다.

 

통일부는 최근 남북 연락채널 복원을 계기로 대북 인도협력 사업에 약 100억 원의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국민의 혈세와 출연금 등으로 조성되는 남북협력기금을 민간단체를 통해 북에다 퍼주고 교류의 물꼬를 트겠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억류되어 노예로 살고 있는 국군 포로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인도적 대북 지원 운운하는 위선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습니다.

 

 

미국 정부는 2019년 북한 석탄 불법 운송에 동원됐던 와이즈 어네스트호를 몰수했습니다. 그 판매대금을 북한에 억류됐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와, 북한에 납치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동식 목사 유족에게 지급했습니다. 그들의 소유권 청구를 받아들인 법원 판결에 따른 것입니다.

 

국군 포로들의 손해배상 소송에 참여해온 사단법인 '물망초’ 관계자는 “다른 나라들은 포로와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노력하는데 우리 정부는 스스로 탈북해 온 국군 포로들마저 통제하고, 돌아가신 분의 부고조차 내지 못하게 했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물망초' 측은 현재 북한에 생존한 국군 포로를 17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그동안 다섯 차례나 정상 회담을 벌이며 평화와 통일을 논했습니다. 그때마다 국군 포로들은 생환을 기대했지만 매번 그들의 존재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좌절만 깊어 갔을 뿐입니다.

 

 

국군 포로 문제를 덮어 두고 벌이는 남과 북의 평화 회담은 국민을 속이는 사기극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국군통수권자라면 당연히 그들의 생사를, 근황을 캐어 묻고 조건 없는 송환을 요구해야 합니다. 국군 포로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보상보다 훨씬 시급한 생존의 문제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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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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