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몰이꾼 [추천시글]

 


어린 소몰이꾼
2021.06.18

어느 동네를 가나 비슷한 유래가 있는 지명(地名)이 있습니다. 예전에 무당이 살았던 동네는 흔히 ‘당골’이라 부릅니다. 들판에서 좁아지는 산길로 들어가는 동네는 ‘노루목’, 조선시대 남아들이 성인식을 하든 선돌이 있던 동네는 ‘선들’, 한양을 향해 가는 길목에 관리들이 하룻밤 숙식을 하던 역(驛)이나 원(院)이 있던 곳은 ‘원골’, 대나무가 많은 지역은 ‘대삿말’, 1년 내내 햇볕 보기 힘든 골짜기는 ‘어둠골’, 뱀이 많이 나오는 골짜기는 ‘뱀골’ 등입니다.

충북 영동군(永同郡)은 길 영(永)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예전에는 길동(吉同)이라 불렀습니다. ‘길동’은 길이 많은 지역입니다. 지금처럼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기 전에는 경북 상주, 전북 무주,진안,장수,남원. 충남 금산을 가려면 영동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그중에 영동에서 북쪽에 있는 학산면(鶴山面)에는 전북의 무주, 진안, 장수, 남원, 전주까지 가는 길목과, 충남의 금산으로 가는 삼거리가 있습니다. 면소재지라도 가까운 영동읍이나 무주 금산보다 오일장의 규모가 몇 배나 컸습니다.

오일장의 랜드마크는 당연 우시장입니다. 요즈음은 소를 팔러 가거나 입식을 할 때 트럭에 싣고 갑니다. 예전에는 ‘소몰이꾼’이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소몰이꾼은 가깝게는 삼십오 리 떨어진 영동에서, 멀리는 진안이나 장수에서 칠팔십 리 밤길을 걸어 소를 몰고 옵니다.
그 시절에는 소를 도둑맞았다거나, 소 판 돈을 잃어 버렸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돌았습니다. 그런데도 몇 명씩 짝을 지어 밤길을 걷는 이유는 숙박비를 아끼려는 목적과, 밤에는 비교적 기온이 서늘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한겨울에는 우시장이 다른 계절보다 한가했던 이유도 소몰이꾼들의 이동이 쉽지 않은 까닭으로 짐작이 됩니다.

친구 정규네는 소몰이꾼들이 이른 새벽에 도착해서 아침까지 머무는 마방(馬房)을 운영했습니다. 마방에서 하는 일은 단순히 소몰이꾼들의 잠을 재워주고 식사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소몰이꾼들의 식사보다 중요한 것은 먼 길을 걸어 온 소를 배불리 먹이는 일입니다. 그래야 날이 새고 우시장에 도착하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규는 장 전날에는 새벽부터 꼴을 베러 지게를 지고 냇가나 산으로 갑니다. 학교 가는 길에 우연히 정규를 만나면 저절로 걸음이 멈춰집니다. 자신의 덩치보다 몇 배나 되는 꼴을 얹은 지게를 진 정규의 얼굴은 땀투성이입니다.

​온몸에 이슬이 마르지 않은 풀과 티끌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씩 웃어주고 부지런히 집으로 가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날이 컴컴해질 무렵까지 꼴을 베어 날랐습니다.
소가 많이 들어오는 날은 아예 결석을 하고 종일 꼴을 벴습니다. 정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정규 아버지도 종일 꼴을 베어 웬만큼 농사를 짓는 집안의 두엄 크기만큼 쌓았습니다.

정규가 꼴 베는 일이 너무 힘들어 보일 때는 “깔 베는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너무 미안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여름밤 우연히 정규와 냇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냇물에서 목욕을 하는 동네 아주머니들이나 처녀들도 보이지 않는 밤이 이슥한 시간이었습니다.

​낮 더위에 뜨겁게 달아오른 바위의 표면이 온돌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냇가나 강가에서 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빛나고 많습니다. 밤이 깊어서 모기도 없었습니다. 별빛을 받은 시냇물은 은종이를 깔아 놓은 것처럼 반짝반짝거렸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내가 깔 베는 일이 힘드냐고 묻지 않는 유일한 친구다.”
정규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저는 아연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습니다.


“너는 내 맘을 알기 때문에 묻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힘이 들지 않겠냐? 제일 힘들 때가 학교 가방 대신 깔지게를 지고 마당을 나설 때다.”

 


정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는 정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서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규는 중학교 2학년 때 꼴 베는 것이 너무 싫어서 가출을 했었다고 합니다. 동갑내기 소몰이꾼을 따라서 영동 읍내까지 밤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동갑내기 소몰이꾼으로부터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데다 엄마도 병이 들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장으로 나섰다는구먼. 품일을 나가도 삯을 제대로 쳐 주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누가 소몰이꾼으로 나서보라고 권유를 했다능겨…”
정규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2살 때 부터 시작한 소몰이꾼의 말을 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발이 부르트다 못해 굳은살이 박이고, 어느 때는 엄지발가락이 돌에 치여서 고무신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도, 아프다고 주저앉으면 어른들이 다음부터 데리고 가지 않을까봐 참고 걸었다는 겁니다. 소 한 마리를 몰아다 줄 때마다 삯으로 받는 돈이 없으면 가족이 굶는다는. 어서 커서 나도 몇 마리씩 소를 몰고 가면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땅을 살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가출을 포기하고 집으로 되돌아 왔답니다.

 


그날 이후 꼴을 베기 싫거나 힘들 때마다 소몰이꾼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난다며 달빛 아래서 하얗게 웃었습니다.
그러던 정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양조장 경리로 취직을 했습니다. 다들 객지로 나가서 취직을 하던 시절에 면소재지에 있는 양조장에 취직한 정규의 속내를 이해한 것은 군대를 갔다가 온 후였습니다.

정규는 양조장에서 받은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서 서 마지기의 논을 샀습니다. 논은커녕 일주일 내내 술독에 빠져 살던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규가 고등학교 친구처럼 보이지 않고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처럼 보여서 할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 정규에게 또 한번 충격을 받은 것은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읍내 예식장이 없어서 전통 결혼식이 많았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한 방에 모여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습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정규 어머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술에 취한 정규가 어머님을 껴안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영문을 몰라서 서로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습니다. 그때 문 밖에 서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그려, 실컨 울어라. 오늘 안 울면 언제 울겄냐?” 하시며 치맛말기로 눈물을 닦으셨습니다. 저는 그 날에서야 정규의 친부(親父)는 일찍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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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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