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한정판 이야기 [추천시글]

 

 

 

한정판 이야기

2021.06.11

 

탁탁탁, 탁탁탁. 아주 빠르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문(門)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노크도 없이 문은 확 열렸고 동시에 “소장님 이거 가짜죠?”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저는 만년필을 받아들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정판입니다.”

 

당연히 한정판(限定版)의 역사는 1883년에 시작된 만년필 전체의 역사보다 짧습니다. 어느 것을 처음으로 보느냐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파커사가 1965년 내놓은 4,821개 한정의 일명 ‘스페인 보물선(75 SPANISH TREASURE FLEET)’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715년 플로리다 해안에서 가라앉은 스페인 보물선을 인양하여 나온 은(銀)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00년 초반 등장한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펜’과 1919년에 나온 워터맨 35주년 만년필은 왜 한정판이 아닐까요? 특별하지만 수량이 명확하지 않아 이런 경우는 특별판이라고 부릅니다. 또 이런 경우는 특별한정판으로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1968년 미국의 우주 탐사 10주년을 기념하여 250개 만들어진 ‘SPACE PEN’은 볼펜인데, 이 볼펜의 일부는 매우 특별한 재질로 만들어졌습니다. 1962년 로켓 머큐리-아틀라스 6호는 지구 궤도를 3바퀴 돌고 귀환하는데, 이 볼펜의 누름 버튼이 아틀라스 6호의 부스터(booster)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쉽게도 이 특별한정판은 일반 판매는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 (1900년대 초 워터맨사)

 

지금은 몽블랑의 시대이지만 1960년대~1970년대는 파커의 시대였습니다. 특별한 재질로 파커75 만년필을 베이스로 하여 한정판을 만드는 파커사의 공식(公式)에 어느 회사도 견제하거나 제동을 걸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정판을 만들 수 있는 회사 역시 파커사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1970년에 여객선 엘리자베스에서 황동을 가져다 만든 ‘퀸 엘리자베스’와 1976년 독립기념관 나무 바닥 조각을 새끼손톱보다 작고 동그랗게 만들어 뚜껑 꼭대기에 끼운 미국 독립 200주년을 뜻하는 ‘바이센테니얼(Bicentennial)’ 역시 파커75 만년필의 외관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파커는 기본 라인인 파커75가 세상을 평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정판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다른 회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파이로트사는 회사의 65주년을 기념하여 65를 내놓았고, 1988년엔 70주년을 맞이하여 70을 내놓았지만 만년필의 역사를 새로 쓸 정도의 반향(反響)은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일본 회사들 역시 한정판은 회사의 설립 몇 주년 기념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습니다.

 

1992년 몽블랑은 한정판이 세상을 바꿀 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1930년대 자사의 명작이었던 ‘139’를 현대의 기술로 살려내어 ‘헤밍웨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붙여 내놓은 이 아름다운 만년필은 대단한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몽블랑이 성공한 이유는 잘 지어진 이름 과 기존 라인에 재질만 바꿔 만든 파커사 한정판의 한계를 과감히 깨고, 만년필의 이름에 어울리는 외관이 나오도록 심혈을 기울여 만년필을 만든 덕택이었습니다.

 

 

어쩌다 기념으로 한 번 만들던 한정판을 미래를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고 성공까지 이끌어 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접근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성공으로 만년필 회사들은 몽블랑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정판이 중요하고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봇물 터지듯 한정판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것들은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살짝 모양을 바꾸거나 색상만 다른 것들을 소비자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입니다.

 

몽블랑 헤밍웨이(1992년)

 

소비자들은 매우 현명합니다. 잠깐은 속일 수 있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만든 만년필이 반드시 사랑 받기 마련입니다. 1등은 그냥 마케팅이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은 몽블랑의 시대지만 이것 역시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기회는 더 노력하는 자에게 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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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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