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가방과 강남 아파트[추천시글]

 

낡은 가방과 강남 아파트

2021.06.02

 

2010년 11월 북한이 서해 연평도를 포격했을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하 벙커에서 항공점퍼라고 하는 검은색 가죽 점퍼를 입고 현황보고를 받는 모습을 보며 ‘너무 폼 나게 입으셨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긴 한 벌에 천만 원 가까이 하는 이태리 유명 맞춤 정장 로로피아나를 즐겨 입던 그분이 다른 군인들과 똑같은 전투복을 입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필자의 눈에는, 그 모습이 군 미필자인 당시 대통령이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다소 과장된 의상을 선택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런데, 그 항공 점퍼가 근사해 보였는지 문재인 대통령도 군부대 행사에서 종종 청와대 와펜(wappen)을 가슴에 붙인 검은색 가죽 항공 점퍼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공수부대 출신인 현 대통령이 항공점퍼를 입은 모습은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보이는 것과 살아온 것에 대한 일체감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보궐 선거에서 구멍 난 운동화를 신고 유세를 했던 박영선 후보를 보며, 한 20대 유권자가 “재산이 많은 박 후보가 그런 모습을 보이니 표를 얻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처럼 보여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는 반응이 나왔던 것 역시 살아온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일체감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판세가 기울어지자, 박영선 후보는 구멍 난 운동화를 꺼내 신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효과를 볼 수 있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오히려 여론이 더 악화했던 겁니다.

 

문재인 정권 초기인 2017년 6월, 공정위원장 후보로 국회 인사청문회장에 낡은 가방을 들고 나타난 김상조 당시 한성대 교수가 화제가 됐었습니다. 아래는 당시 언론에 소개된 대중의 반응입니다.

 

“책상 밑에 놓아둔 낡은 가방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굴곡진 삶의 궤적이 느껴진다.”, “이분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언제 샀을지도 모를 정도로 낡은 가방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한 경제학자의 삶을 웅변보다 강렬하게 보여주는 그의 낡은 가방.”

 

이렇게 가방 하나로 단박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정치도 유행이 있는지 그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 지명자가 2017년 8월 22일 서초동 대법원 청사를 방문할 때, 자신이 근무하던 춘천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탈 권위, 서민적인 모습에 기대감도 같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우려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대법원장의 출근길 교통통제가 도마 위에 오른 것입니다. 임명 전에는 버스로 상경, 임명 후엔 3부 요인 의전을 적절히 활용해서 출근 때마다 집 앞 잠실 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없이 바로 통과한 겁니다.

 

이번 정부에서 두루 요직을 거친 낡은 가방의 주인공인 김상조 전 정책실장도 자신 소유의 강남 아파트 전세값을 과하게 올리면서 비난을 받고 경질됐는데, ‘한 경제학자의 삶을 웅변보다 강렬하게 보여주는 그의 낡은 가방’이라는 극찬은 이제 어디서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보여준 것과 살아 온 것이 다름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결국 이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뒷굽이 닳은 구두, 낡은 가방, 오래된 손목시계, 일회성 대중교통 이용으로 더 이상 대중의 마음을 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이참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미디어의 태도를 반성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미디어의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는 뜻은 대중의 경박함 역시 반성해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

 

대중의 수준에 맞는 정치인이 선택을 받는 시대입니다. 미디어 역시 대중의 클릭 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입니다. 실물 경제에서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낡은 가방을 들고 나타난 경제학자에 열광했고, 버스를 타고 상경한 대법원장 지명자에 호감을 가졌던 대중과 여기에 편승해 대중이 보고 싶은 것을 골라서 보여 준 미디어로 인해 이 사람들이 일을 잘하는지, 시대를 이끌어갈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전체를 호도할 수 있는 단편적인 사진보다는 다소 지루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전체를 확인하는 양식 있는 언론인의 활자를 통해, 공적인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검증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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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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