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주도세력은 가난하고 무식해야” -중국 문혁(文革)의 교훈-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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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주도세력은 가난하고 무식해야” -중국 문혁(文革)의 교훈-

2021.02.26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정지(停止)를 뜻하면 안 된다. 신호등의 정지신호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꿔버렸다. 교통사고만 엄청 늘어났다.
-세계적인 베이징덕 요리점 취안쥐더(全聚德)는 ‘자본가가 인민의 피땀을 착취한 상징’이다. 철 간판을 부수고 ‘북경오리요리점’ 나무 간판을 내걸게 했다.
-청두(成都)의 대표 음식 마파(麻婆)두부도 구시대를 연상시킨다. 쓰촨(四川)식 매운맛을 가리키는 마라(麻辣)두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자묘(孔子廟)의 ‘만세사표(萬世師表)’ 편액을 떼어내 불사르고, 공자 목상(木像) 을 밧줄로 묶어 조리돌림했다.(자유칼럼 2016년 12월 12일 <진실의 세상> 참조)

​중국 문화혁명(1966~1976) 때 홍위병들이 저지른 작란(作亂)들입니다. 문화혁명의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실상은 1950년대 중하반기의 심각한 식량 부족,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 불만 확산, 지식인과 청년들의 좌절, 국가경쟁력 향상 명분의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 정책 반작용 등으로 세력이 약해진 마오쩌둥(毛澤東)이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혁명이란 이름의 대반격 작전입니다.
혁명 주도세력은 첫째 ‘가난하고’ 둘째 ‘무지한’(一窮二白 일궁이백) 우중(愚衆)이라야 한다는 마오(毛)의 논리에 따라 그 선봉에 나선 행동대가 홍위병(紅衛兵)입니다.

​문혁(文革)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1950년대 마오쩌둥의 전횡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중국은 한국전 참전(1950~53년) 이후 농업생산성이 떨어진 데다 태풍 등 재해가 겹쳐 전 인민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또 냉전 상황에서 서방 세력과의 대결에 대처할 철강이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게다가 소련과의 관계도 냉랭해지고 지원도 줄었습니다. 무기 구입 대금은 농산물로 갚아야 했습니다.
막장에 몰린 마오는 자력갱생 정책으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설립을 밀어붙였습니다.

​# 毛의 설익은 증산 정책으로 재난과 기근 자초

​대약진운동은 공산 혁명 후 중국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1958~60년 마오가 전개한 중국공산당의 농·공업 대증산 정책입니다. 공산당은 ‘15년 안에 영국, 20년 내에 미국의 철강 생산량을 추월하자’는 구호 아래 전국에 100만 개의 소형 제철소를 만들었습니다.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용광로에 처넣고, 나무란 나무는 다 베어 연료로 태웠습니다.
그러나 생산한 철강의 30%는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농기구·솥단지 같은 고철로 만든 선철(銑鐵)은 품질이 떨어지고, 철강을 원료로 쓰는 공장도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철강 생산을 앞세운 도시 중심 공업정책으로 농촌지역은 노동인력이 모자라는 데다, 헐벗은 산은 홍수와 산사태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생산성은 더 크게 떨어졌습니다.
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 농토의 99%를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생산량이 배로 늘었다고 했으나, 이는 집단농장 책임자들의 면피성 허위 보고로 드러났습니다. 허위 보고를 토대로 당은 목표량을 더 높여 생산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아울러 마오는 식량 증산의 일환으로 ‘참새 대숙청’이라는 난센스 정책을 폈습니다.

​1958년 마오는 “참새가 농사를 다 망친다”는 농민의 청원에 따라 참새 때려잡기[打麻雀 타마작]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도록 지시했습니다.
3억 명의 인민들이 새총·올가미·그물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징과 세숫대야를 두드리고 함성을 질러댔습니다. 참새는 땅에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해 공중에서 맴돌다 탈진한 채 떨어져 죽었습니다. 새총으로 참새를 많이 잡은 사람은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58년 한 해 동안 참새 2억1,000만 마리가 죽어 멸종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 대기근으로 남한 인구보다 많은 인민 굶어죽어

​참새 대숙청의 역풍은 바로 다음 해에 닥쳤습니다. 천적이 사라지자 해충이 창궐해 대흉작과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습니다. 마오는 흐루쇼프 소련 총리에게 간청하여 연해주의 참새 20여만 마리를 수입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중국에서는 대기근이 이어져 공식적으로 2,000만 명, 학자들에 따라서는 3,000만~6,0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남한 인구가 2,500만 명 정도였으니 참상을 짐작할 만합니다.(자유칼럼 2015년 4월14일 <난센스 정치의 허실> 참조)

대(大)약진운동이 대(大)실패로 끝나자 마오는 2인자 류사오치(劉少奇)에게 국가주석 자리(1959년 4월~9월)를 넘겨주고 잠시 2선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맛을 누려온 마오는 덩샤오핑(鄧小平) 화궈펑(華國鋒)과 손잡은 류(劉)의 시장경제정책을 주자파(走資派)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적 제거에 나섰습니다.
참새 잡이에 동원된 아이들이 10년 뒤 홍위병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1966년 문혁이 시작되자 류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사상 비판, 가택 연금, 홍위병의 폭력, 유배생활에 시달리다 1969년 사망했습니다.

문혁 초기의 홍위병 주력은 출신성분이 좋은 공산당 간부 자녀들인 보황파(保皇派)였으나, 진영이 불어나면서 젊은 서민 출신의 조반파(造反派) 세력이 주도했습니다. 기차표·숙박비·밥값을 무료로 제공받은 홍위병은 극렬한 주자파 사냥으로 대륙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살인이 계속됐습니다.
거의 내전 상태에 이른 홍위병 난동은 마오가 “농촌에서 배워야 한다”며 내린 하방(下放)운동으로 다소 진정되었습니다. 하방 조치된 홍위병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중·고 중퇴 학력의 조반파 지도부급은 문혁이 끝난 뒤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졌습니다. 노후도 비참했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입니다.

​반세기 전 남의 나라 일이지만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탈 원전 강행이 빚은 월성 1호기 가동 중단 결정과 산업부의 허위 보고 △전력 부족을 메우기 위한 태양광발전 시설 확산과 산사태·홍수 △실시설계도 나오기 전에 가덕도신공항 착공하려는 국회, "동네 하천 정비도 그렇게 안 한다"{조응천 민주당 의원) "매표 공항 아니냐"(심상정 정의당 의원) 개탄 △새똥 닦기·비둘기 먹이 주기 감시원·경로당 거리두기 감시자에 세금 쓰는 K뉴딜 일자리 △“입양 취소·아이 바꾸기” 문 대통령의 입양아 문제 해법 파문 △정부, ‘세금 일자리’ 부처별 할당량 압박 △백선엽 장군 묘지에 오물 뿌리고 조화 뽑기···. 강 건너 불이 아닙니다.

​국민이 주인[主權在民] 아닌 특정인의 추종자로 전락하면 독재정권이 탄생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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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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