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나의 추억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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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의 추억

2020.12.01

그는 마치 통통 튀는 고무공 같았습니다. 축구공보다는 오히려 럭비공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축구가 그랬고 그의 삶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를 상대해야 하는 마크맨은 물론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다스리고 통제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축구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의 한 사람이자 악동으로 불리던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가 지난달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0세.

‘Adios, Saint Diego. Argentina cries for you!’
뮤지컬 대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에비타(Evita; 에바 페론)를 위해 ‘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명곡을 작곡했지만 지금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마라도나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를 가장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슈퍼스타 마라도나가 떠나던 날 아르헨티나 정부는 사흘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습니다. 마라도나의 시신이 안치된 대통령궁에 조기가 내걸리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에게 눈물로 작별인사를 보냈습니다. 한때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유럽 축구 정상의 기쁨을 누렸던 이탈리아 나폴리에서도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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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의 추모 열기

마라도나는 최근 뇌 경막 아래 피가 고이는 경막하혈종으로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약물과 알코올에 시달린 데다 고도 비만으로 건강에 대한 우려가 떠나지 않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놀라운 수준을 생각하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또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월드컵 현장에서 직접 그를 인터뷰하고(물론 통역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신기(神技)를 지켜본 사람의 의무감으로 오늘은 그의 얘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1986년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32년 만에 처음 월드컵 예선 관문을 뚫었습니다. 그러나 본선 1라운드에서 하필이면 전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와 같은 A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강팀과 약팀을 적절히 조합하는 FIFA(세계축구연맹)의 조 추첨 방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 허정무 선수가 거의 마라도나의 전담 수비로 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마라도나의 현란한 드리블, 정확한 어시스트로 발다노 등 골잡이들이 잇달아 골을 터뜨려 우리 팀은 3-1로 졌습니다. 그러나 마라도나도 허정무의 거친 태클에 여러 번 그라운드에 나뒹굴어야 했습니다. 경기 직후 마주친 아르헨티나 기자들이 허정무가 아예 마라도나 걷어차기에만 열중했다며 화를 냈습니다. 그들에게 “마라도나 같은 선수를 파울 없이 막아낼 재주가 있었겠느냐”고 변명하던 생각이 납니다. 아쉽게도 우리 팀은 이탈리아에게 3-2로 지고, 불가리아와 1-1로 비겨 1무2패의 성적으로 도중하차했습니다.

마라도나의 신기를 목격한 것은 우리 팀이 귀국한 후 벌어진 8강전에서였습니다. 호적수 잉글랜드와 전반을 득점 없이 비기고 후반 5분쯤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잉글랜드 문전으로 높이 뜬 볼을 165cm의 단신 마라도나가 뒤쫓고 잉글랜드의 명 키퍼 피터 쉴튼도 마주 뛰어나왔습니다. 쉴튼이 긴 팔을 뻗는 순간 볼은 마라도나의 머리인지 손인지 알 수 없는 신체 부분에 닿으며 골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스탠드에 멀리 앉은 관중은 물론 그라운드 위의 심판조차도 분간하지 못한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귀중한 선제골을 얻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신의 손’ 장면이었습니다.

불과 4, 5분 후 마라도나의 결승골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신의 손’은 축구계의 가장 부끄러운 추문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잉글랜드 미드필드에서 볼을 잡은 마라도나는 환상적인 드리블로 한순간에 수비수 서너 명을 차례로 따돌리고 추가골을 성공시켰습니다. 경기가 2-1 패배로 끝난 후 기자회견장에서 잉글랜드 보비 롭슨 감독은 문제의 선제골에 대해 한마디 비난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라도나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는 준결승전에서 벨기에를 2-0, 결승전에서 서독을 3-2로 누르고 우승, 197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을 품에 안았습니다. 대회 최우수선수 마라도나가 목말을 탄 채 황금빛 FIFA 컵을 쳐들고 아즈테카 그라운드를 돌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축구 천재로 마라도나와 펠레를 비교하곤 합니다. 그러나 두 선수는 활약 시기도 다르고 플레이 스타일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니 간단하게 누가 더 우수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펠레가 탁월한 득점력으로 골문을 노린 전문 골게터였다면 마라도나는 필드 전체를 휩쓸며 플레이를 이끌어가는 팀 리더였습니다. 기막힌 어시스트로 자기 편 골게터에게 슈팅 찬스를 만들어주는가 하면 스스로 상대 진영을 돌파해 골을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축구는 더욱 아기자기하고 흥미로워졌습니다. 그라운드에서 배번(背番) 10번을 다는 선수들의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성도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 1986년 월드컵 우승의 환희

어느 분야에서나 신동(神童)의 생애는 간단치 않은 모양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빈민가에서 자란 마라도나는 16세에 벌써 프로 1군에 발탁되었고, 19세에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을 일구어냈습니다. 아르헨티나, 스페인, 이탈리아 프로리그에서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고 월드컵 2연패를 노리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그 후 이탈리아 리그에서 잇달아 금지약물 양성반응을 보여 그라운드에서 퇴출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감독 생활 역시 선수 시절과는 달랐습니다. 차라리 감독이라는 경력은 갖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길지 않은 생애에 축구 천재의 명과 암은 너무도 짙게 갈렸습니다.

마라도나가 떠나던 날 뉴욕타임스는 “그의 생애는 눈부셨지만 결함투성이었고, 혼란스러웠지만 화려했다”고 평했습니다. 살아 있는 축구 전설 펠레(80)는 “정말 슬픈 소식이다. 나는 위대한 친구를 잃었고 세상은 전설을 잃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늘에서 우리가 함께 공을 차게 될 것”이라며 애도했습니다.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현역 스타들의 추모도 잇달았습니다.

눈물로 떠나보낼 스타를 가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어쩌면 그만큼 행복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잘 찾아보면 우리에게도 정말 눈물로 이별을 슬퍼해야 할 만큼 좋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우리는 별 도움이 되지도 않을 일로 너무 캐고 따지고 물고 늘어져 그들과 우리들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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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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