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문 대통령이 풀고 가야 [장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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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관계 문 대통령이 풀고 가야

2020.10.31

연례 한중일 정상회의가 시작된 건 2008년입니다. 원래 한국과 중국, 일본 3국 정상이 회동하는 정례회의는 따로 없었는데, 아세안(ASEAN) 정상회의에 3국이 참여하는 ‘아세안+3’회의가 활성화하면서 따로 3국 정상회의의 틀을 가동키로 한 것입니다. ‘아세안+3’회의가 주로 역내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자리라면, 한중일 정상회의는 안보문제를 포함한 ‘동북아 3강’의 보다 포괄적이고 긴밀한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무대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정상회의는 연말이 눈앞인데도 아직 일정조차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정상회의는 3국이 돌아가면서 개최하는데, 중국 칭다오에서 열렸던 지난해 회의의 바통을 받아 올해는 우리나라 서울에서 열려야 합니다. 하지만 2018년 10월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한일 간 대립으로 개최 여부조차 극히 불확실해진 상황입니다.

물론 한중일 정상회의가 매년 차질없이 열린 것은 아닙니다. 2012년 중국 베이징 회의 이후 2년여 동안은 공전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전향적 태도를 회의 개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서 2년 연속 개최가 무산된 것입니다. 올해는 거꾸로 일본이 발목을 잡는 형국입니다. 일본은 지난 9월 하순께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수용할 만한 조치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현금화하지 않겠다는 보증이 없으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방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우리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구체적 의제에 대한 입장 타결을 추구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상급 외교는 현안에 대한 공감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막중한 가치를 갖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올해 회의는 한일 간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외교갈등 해소는 물론, 한국 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로 뒤틀린 한중 관계 회복을 시도할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회가 또 다시 과거사 문제로 발목이 잡히게 된 것입니다.

2018년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한일 양국 간 극단적 갈등을 불러일으킨 건 그 판결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청구권협정)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협정에는 협정 체결로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됐습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대일 청구권 문제를 재검토한 국내 민관공동위는 ‘한일 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자금 3억 달러에 강제징용 보상금이 포함됐다고 본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대법원은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어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판시한 것입니다. 협정에 관한 대체적 해석과 달리, 대법원이 새삼 청구권 인정 판결을 낸 취지의 핵심은 협정문과 그 이후 해석에서 해결됐다고 본 ‘통상적 청구권’이나 ‘보상’과, 징용 당시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 개인에 대한 ‘위로금’ 배상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반면, 일본은 협정에서 재산, 권리, 이익을 모두 포괄하는 청구권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규정한 만큼, 우리 대법원의 판결이 어떻게 포장되든 국가 간 조약을 어긴 국제법 위반이라는 주장입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판결 직후, “국제사회의 국제법 상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는 우대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등 우리나라를 아예 ‘국가 간 약속을 어기는 몰상식한 나라’로 몰아붙였습니다.

개인 간의 다툼에서도 이런 식의 싸움은 끝을 낼 수 없습니다. 한쪽이 부당한 폭력을 행사해서 다른 측에 신체상, 재산상 피해를 줬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충 타협을 해서 가해자가 위로금을 줬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나중에 모욕적 상황에 대한 배상은 위로금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별도 배상을 요구하고, 가해자는 배상 다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 다툼이 결론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감정만 부풀려지고, 비정상적인 대립이 심화되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은 보복조치로 핵심 소재, 부품 등에 대한 금수조치를 가동했고, 우리나라는 한미일 동맹체제의 한 축인 양국 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폐기까지 압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우리나라나 일본 정부가 이런 문제로 대치상황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건 바보짓이라고 봅니다. 일본은 그렇다 치고, 우리 정부는 한반도 평화정책부터 4차 산업혁명 협력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협력해 더 좋은 결과를 낼만 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본과의 균열이 한미관계의 근간까지 흔드는 지경으로 확대되는 상황도 문제입니다. 상대가 완고하면 우리가 너그럽고 유연하게 상황을 풀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군대 위안부 피해나, 강제징용 피해는 일본의 역사적 잘못이지만, 나쁜 이웃을 두고도 멍청했던 우리나라의 ‘원초적 잘못’이기도 합니다. 이젠 해당 피해에 대한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되, 피해자들에 대한 개인적 배상이나 보상은 우리 정부가 맡는 것도 나라의 긍지를 높이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대법원 판결 때부터 문재인 정부가 곧이곧대로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내려 하기보다, 사법부 판결을 존중하되, 판결 내용에 부응하는 배상은 우리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는 묘수가 나오길 바랐습니다.

따지고 보면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낸 ‘문희상안’ 역시 사실상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피해 배상 해결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최근까지도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최고의 법적 권위와 집행력을 가진다”며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입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어차피 임기 내 한일관계 회복은 물 건너갔으니 섣불리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차기 정부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순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1년이면 강산이 바뀔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한반도 및 글로벌 정세를 감안하면, 내년 도쿄 올림픽 때까지 한일관계 회복을 미루는 것도 너무 안이합니다. 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한일관계 파탄의 막중한 책임을 자각하고, 당장 한중일 정상회의부터라도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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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장인철
한국일보 문화ㆍ정치ㆍ경제부 기자, 뉴욕특파원 역임. 현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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