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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앓는 당신에게

2020.10.29

‘윤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물비늘이라고도 하지요.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합니다. 해가 막 떠오른 아침과 해가 지는 어스름에 볼 수 있습니다. 태양이 빛나는 한낮에도, 휘영청 달 밝은 밤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침과 한낮의 윤슬은 물을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저녁 어스름 윤슬엔 물이 황금색으로 빛나지요. 윤슬은 바다에도, 강에도, 호수에도 드리웁니다. 나는 잔잔한 호수 위에 내려앉는, 이른 아침의 윤슬이 제일 좋습니다. 물의 빛깔이 하나가 아닌 것은 순전히 윤슬 덕입니다.

‘볕뉘’도 참 예쁜 우리말입니다. 작은 틈이나 그늘진 곳에 비치는 자그마한 햇볕입니다. 말 그대로 볕이 누워 볕뉘입니다.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따뜻해지지 않나요. 표준국어대사전은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이라고 설명합니다.

“(…) 300년 된 숲길을 걸을 때/볕뉘가 틈을 비집고 들어와/배웅을 자처한다//바람이 나무를 쓰다듬을 때마다/내 귓가에 박혔다 떠나는/이파리들의 푸른 목소리/다 알고 있다는 듯/우듬지 끄트머리가 둥근 결속으로 나를 반긴다 (…)” 이숲의 시 ‘볕뉘’입니다. 울창한 숲에선 볕뉘를 쉬이 만날 수 있습니다.

싫어하는 말도 있습니다. 우울, 허탈, 게으름, 거짓…. 이 중 우울은 정말 힘든 감정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한 상태입니다.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으니 몸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우울은 근심할 우(憂)와 빽빽할 울(鬱)로 이뤄졌습니다. 鬱, 글자만 봐도 속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힙니다. ‘답답하다’라는 뜻이 부여된 이유를 알겠습니다. 화병에 울이 붙은 울화병(鬱火病)은 가슴이 답답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입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인데도 우울해 입맛을 잃었다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중장년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가을을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등산, 여행은커녕 친구들과의 모임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집에만 있다 보니 체력은 더 떨어지고 여기저기 붙은 살들이 괴롭힌다고 푸념합니다. 낭만의 계절이 아닌 을씨년스럽고 초라한 가을입니다.

코로나19 시대, 가을앓이를 극복하는 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전문의들은 영혼과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서울시 코비드(covid)19 심리지원단 소속 의사들이 내놓은 ‘마음 백신 7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격려백신(나를 믿고 응원하자), 긍정백신(일상에서 좋은 일을 해나가자), 실천백신(나와 타인을 위해 위생수칙을 지키자) , 지식백신(바이러스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가짜 뉴스는 멀리하자), 희망백신(감염병은 언젠가 끝난다고 믿자), 정보백신(보건소와 진료소 등 도움받을 곳을 알아두자), 균형백신(몸과 마음, 이성과 감성의 치우침을 없애자)입니다.

하나같이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질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고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작은 실천들이 가을앓이를 극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저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니까요.

마음이 무너지면 몸도 무너집니다. 노래를 듣고(부르고) 춤을 추고 영화도 보면서 감성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시집 한 권 들고 산과 물이 있는 곳으로 떠나 보세요. 말간 가을 햇살이 그리는 세상이 수채화처럼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지금, 경춘선 철로변 호수가 윤슬로 반짝입니다.

숨 한 번 크게 쉬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주시어/ 그것들을 성숙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라고 노래한 릴케의 시를 읊조려 보세요.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음미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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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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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gi, conpaper E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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