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상소 논란을 지켜보며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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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상소 논란을 지켜보며

2020.09.01

문재인 정부를 상소문 형태로 비판한 청와대 국민청원 ‘시무7조 상소’가 40만 명 가까운 동의를 얻어 청와대가 답변을 해야 하는 기준 2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청와대가 뭐라고, 어떤 형식으로 답변을 할지 궁금합니다.

이번 상소는 국가원수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옛글 형식으로 세금문제 등 일곱 가지 폐해를 추궁하고 일신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글을 쓴 진인(塵人) 조은산이라는 사람은 짐작과 달리 39세의 젊은 가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 바 있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이런 형식의 글을 쓰기까지 그는 많은 고심을 했을 것입니다. 세로로 읽으면 현미, 해찬, 미애, 조국 이런 이름이 드러나도록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시대의 명문이라고까지 생각되지는 않지만, 단순한 패러디와 기롱(譏弄)으로 넘기기 어려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다 해주었다고 반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더불어민주당의 골수 지지자들로서는 당연히 불편하고 불쾌한 글일 것입니다. 이 상소에 대해 SNS에 글로 나타난 대표적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70대 전직 언론인 박영호 씨가 쓴 글. 그는 상소자의 눈치없는 어리석음을 이리저리 비꼬고 질타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역성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추미애가 미친 년 널뛰듯 하며 칼춤을 추는 건 나도 알지…. 성격이 탐욕스럽고, 변두리 면장감도 안 되면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균형감각이 전혀 없어 법무부 장관으로는 부적합하지. 그러나 고집 하나는 알아주어야 하지 않나? 그 고집 정도 돼야 윤석열을 밀어낼 수 있지 않겠나?” 또 “난 외교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어. 전혀 깜깜이야. 그래서 강경화에게 다 맡기고 있지. 이 여자가 가볍고 촐싹거리고 머리에 든 건 하나도 없지만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황후한테만은 간도 빼줄 듯 잘 하거든….”

그러면서 “장기 집권? 그런 거 없어. 난 퇴임 후 등 따시고 배부르고 감옥 안 가면 된다니까”라고 합니다. 글은 “윤미향, 추미애, 최강욱, 이성윤, 김명수, 김어준, 김경수, 손혜원, 유시민, 이해찬 이들이 있는 한 난 끄떡없으니 처사가 시답잖게 우국충정이라는 말로 날 걱정하진 마시오!”라고 끝납니다.

다른 하나는 림태주라는 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하교(下敎)-시무 7조 상소에 답한다’입니다. 그는 “너의 문장은 화려하였으나 부실하였고, 충의를 흉내 내었으나 삿되었다(하는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나쁘다)”고 상소문의 문체부터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온갖 조작된 풍문이 떠돈다. 나의 자리는 매일 욕을 먹는 자리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정작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학문을 깨우치고 식견을 가진 너희 같은 지식인들이 그 가짜에 너무 쉽게 휩쓸리고 놀아나는 꼴”이라고 말합니다.

림씨의 글은 “무지는 스스로를 망치는 데 쓰이지만, 섣부른 부화뇌동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어 모두를 병들게 한다. 내가 나를 경계하듯이 너도 너를 삼가고 경계하며 살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도 백성의 한숨을 천명으로 받든다”는 말로 끝납니다.

림씨는 지난해 대자보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판한 서울대생들에게 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고 '훈계'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2014년에 낸 산문집에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씨가 추천사를 써준 인연도 있습니다. 그런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청와대가 이런 형식과 내용의 답변을 준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상소를 했으니 그에 맞춰 비답(批答)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형식을 갖추려 할 수도 있겠지요. 더욱이 몸을 날려 강제수사를 하다 병원에 눕거나 영부인을 찬탄하면 승진하고 영전하는 세상이니 문장력을 뽐내며 존재를 과시하려는 문사들이 정권 주변에 수두룩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용역을 줄 수도 있겠지요.

역대 정권은 8·15와 같은 중요한 시기를 맞으면 국민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줄까 각계에 자문해 의견을 수렴하곤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그러지도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라를 잘 이끌어가기 위한 구언(求言)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 구언을 한다 해도 자기들 편만을 대상으로 할 테니 그 결과가 뻔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림태주 시인의 시빗조 글과 같은 답변에 공감과 납득을 하겠습니까?

시무(時務)는 그 시대에 시급하게 다루어야 하는 일을 말합니다. 조선 선조 때 상소와 직언을 통해 개혁과 경장에 진력했던 율곡 이이는 저서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식시무(識時務)를 강조했습니다. 무엇이 급한 일인지를 알라는 뜻입니다. 율곡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금은 나라에 기강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다시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주상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일시에 일깨워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강은 법령과 형벌로 억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이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여 공정함을 얻어 사사로운 마음이 유행하지 않아야만 기강이 섭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방금 한 말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내용입니다. 지금 정부는 착한 것을 착하다 하기는커녕 악한 것을 착하다 하고 있습니다. 국가기강이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환국(換局)은 시국이나 정국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조선 후기에 집권 세력이 급변함에 따라 정국이 바뀌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나는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이후의 국면을 기해환국(己亥換局)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도덕과 정직, 양심에 대한 쿠데타이며 사회 전반을 뒤흔들어 흐리게 만든 일이었습니다. 격탁양청(激濁揚淸)은 탁한 물을 내보내고 맑은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격청양탁(激淸揚濁)을 해왔습니다. 양탁(揚濁)만이 아니라 공들여 양탁(養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무7조에 대해 청와대는 뭐라고 답을 할까? 조은산 씨가 림태주 씨를 반박하는 글을 낸 데 이어 조은산을 탄핵하는 척 정부를 비판하는 ‘경상도 백두(白頭) 김모(金某)’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형식 상소문이 또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백성들끼리의 공방이 아닙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문장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국민들이 접하고 싶어 하는 것은 감성이 아니라 반성입니다. 문식(文飾)과 수사(修辭)가 관심의 초점이 아니라 정의와 도덕을 바로 세우고 올곧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진정성이 절실합니다. 그런 변화와 일신을 보일 수 없을 것 같으면 차라리 입을 닫고 가만있다가 율곡의 말에 고개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던 선조처럼 난군(亂君) 암군(暗君) 혼군(昏君) 용군(庸君)으로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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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손들지 않는 기자들’,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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