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필사(筆寫)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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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필사(筆寫)

2020.08.31

고대 그리스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등이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24권이었습니다. 24권이라 엄청나게 길어 보이지만, 여러 장을 묶어 꿰매고 두꺼운 겉장을 붙인 요즘과 같은 책은 아니었습니다. 낱장을 연달아 붙이고 양 끝에 막대기를 단 두루마리였습니다. 보통 신약성서 한 복음서 정도의 분량이 기록되는 두루마리 한 개의 길이는 약 3m 정도였지만 심심치 않게 그 두 배가 넘는 것, 매우 드물게 10m에 이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값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리아스 전부는 긴 것과 짧은 것을 합쳐 24개의 두루마리이고, 지금처럼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책은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루마리가 되는 파피루스가 이집트에서 독점하던 수입품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활자가 없었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베껴야 하는 수고와 노력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수고와 노력? 실제로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가진 한글로 된 일리아스 제1권 약 20페이지를 베껴보니 꼬박 10시간이 걸렸고 어깨와 허리가 아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필경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것은 눈, 척추, 위장, 옆구리, 아랫배 등을 모두 상하게 한다. 아니 온몸을 아프게 한다. 마지막 문장을 필경할 때의 심정은 오랜 항해 끝에 항구로 돌아온 선원의 해방감과 영원한 은총을 받는 느낌이다.”
-실로스 베아투스 원고를 쓴 클로폰-

<출처:문자의 역사(조르주 장 지음/이종인 옮김. 시공디스커버리)>

 ▲ 파피루스와 갈대펜

그런데 이 힘들고 어려운 필사가 취미가 되면 마술에 빠진 것처럼 재미있어집니다. 당연히 마술에 빠지게 하는 것은 만년필입니다. 일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 벼르고 별러 산 새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순백의 종이에 파란 잉크가 뾰족한 펜 끝으로 샘솟듯 흘러나와 힘들이지 않고, 방향만 바꾸어 주면 종이에 스며들며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는 한 줄 두 줄 차곡차곡 쌓여 한 페이지가 되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허허허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 비싼 만년필이 없단 말이지.”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건 옛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내 큰 문구점에 가면 커피 한 잔 값에 잘 써지는 만년필을 구할 수 있고 치맥(치킨과 맥주)을 한 번만 포기해도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만년필도 살 수 있습니다. 잉크는 어딘가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고, 노트는 180도 잘 펼쳐지고 뒷면 박임이 적은 것을 고르면 됩니다. 사실 만년필은 굳이 비싼 것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1883년에 만들어진 워터맨 방식을 따르고 있고 쓰면 쓸수록 점점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래 써서 자기 손에 길이 나면 그 만년필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저렴한 것 중에 뚜껑이 깨지거나 밀폐가 떨어지는 것, 클립이 끊어지거나 탄력이 떨어지는 것이 있는데, 요즘 이런 것들을 취급하는 문구점은 거의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필사를 위해선 가늘게 써지는 것이 좋습니다, 만년필의 펜촉 굵기는 EF, F, M, B, BB 등으로 구분하는데 가장 가는 EF 펜촉을 사시면 됩니다.

▲ 필사한 <소나기>의 일부

필사에 좀 더 탄력이 붙으면 새롭게 잉크를 사보는 것도 좋은데 너무 비싼 것보다 범용(汎用)으로 사용되는 것들 중에서 고르면 좋습니다. 파커, 펠리칸 등 만년필 회사에서 나오는 가장 저렴한 것이 제 경험상 가장 안전하고 품질도 좋았습니다. 주의할 것은 만년필 회사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글씨가 지워지지 않는 문서 보존용 잉크가 있는데, 이 잉크가 들어간 경우  좀 더 자주 세척을 해주면 됩니다.  세척을 할 때는 펜촉 만큼 뚜껑 안쪽도 중요한데,  물에 적신 면봉으로 꼼꼼히 닦아주면 만년필을 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베껴 쓸 책으론 시집과 단편과 중편이 지루하지 않고 좋은데 저는 중학교 교과서에 있었던 황순원의 <소나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김승옥의  <무진기행>,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재미있게 필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리소설은 성격이 급하신 분께는 금물(禁物)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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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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