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재난 속 작은 기적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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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재난 속 작은 기적

2020.08.28

드문 일이겠지만 살다 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을 만나는 수가 있습니다. 오매불망 그리던 임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든지, 깜빡 잊고 찻간에 두고 내린 귀중한 물건을 전혀 얼굴도 모르는 이의 도움으로 되찾는다든지…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에 사는 열세 살 비토리아 올리베리(Vittoria Oliveri)와 열한 살 카롤라 페씨나(Carola Pessina)의 꿈은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위험 때문에 마땅한 연습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집안이 가난해서 시설 좋은 훈련 캠프에 갈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둘은 살고 있는 아파트 옥상 위에서 연습하는 묘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이쪽 옥상에서 저쪽 옥상으로 볼을 넘기고 받는.

두 소녀의 옥상 테니스 연습은 뜻밖에 SNS를 통해 이곳저곳으로 널리 소개되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화제의 주인공이 된 둘은 어느 날 테니스 연습을 하던 바로 그 옥상 위에서 TV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페더러예요. 코트에서 늘 진지하고 집중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어요. 페더러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너무 좋아 그의 품에 뛰어들지도 몰라요.”

  “페더러의 플레이에서 꼭 한 가지 가질 수 있다면 백핸드 샷이에요.”

  “나는 페더러에게서는 우아한 플레이를, 나달에게서는 힘찬 플레이를 갖고 싶어요.”

  “그런데 둘은 서로 앙숙이잖아?”

  “그래, 둘은 매번 코트에서 맞서 싸우지. 그렇지만 서로 우정을 나누는 사이기도 하잖아.”

그렇게 두 소녀가 재잘거리는 등 뒤에 갑자기 페더러가 나타납니다.

“하이, 카롤라! 안녕, 비토리아!”

순간 두 소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합니다.

“믿을 수가 없어!”

“난 기절할 것 같아.”

두 소녀와의 인터뷰를 기획한 것은 바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 39, 스위스)와 스폰서 기업인 이탈리아 식품회사 바릴라(Barilla)였습니다. 테니스 선수를 꿈꾸며 옥상에서 연습하는 영상을 보고 그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꿈이 돌연 현실로 변한 상황에 잠시 멍해 있던 소녀들은 뒤늦게 옥상에서 비명을 올리고 고함을 지릅니다.

“할머니, 페더러가 우리 옥상에 있어요! 챔피언 말이에요!”

“마네킹이 아니에요. 진짜 페더러예요!”

그렇게 두 소녀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가장 좋아하는 스타 페더러와 옥상 테니스를 즐기고, 파스타를 함께 먹으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위스로 돌아간 페더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전 세계 여러 멋진 곳에서 테니스 경기를 해 보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그 옥상 플레이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코로나로 많은 제약이 있지만 우리는 열정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테니스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솔직히 내가 가졌던 최고의 시간이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세상입니다. 일상생활도 스포츠 활동도 암담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올해 테니스는 4대 메이저 대회 중 호주 오픈만 지난 1월에 치르고,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은 줄줄이 취소되었습니다. 이달 말 개막되는 US 오픈도 남녀 챔피언 라파엘 나달과 비앙카 안드레스쿠, 그리고 페더러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코로나 위험과 부상 때문입니다. 게다가 관중도 없이 벌어지는 경기여서 참가한 선수들의 의욕도 예전 같지는 않겠지요.

챔피언의 소임이 꼭 코트를 지키는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테니스 사상 최다 메이저 타이틀(20회)을 기록하고 있는 최고 스타 페더러는 이탈리아의 한적한 마을 옥상으로 날아가 선수의 꿈을 키우는 두 소녀의 날갯짓에 더없이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페더러가 두 소녀에게 보낸 영상 편지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차오! 카롤라, 비토리아! 서프라이즈(깜짝 선물)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너희 둘에게 꼭 알맞은 여름 캠프를 찾아냈단다. 라파 나달 아카데미에 너희들 얘기를 해 두었어. 빨리 짐을 꾸리지 않고 뭐해! 재미있게 잘 지내, 안녕!“

라파 나달 테니스 아카데미는 지난 2016년 나달(Rafael Nadal, 34, 스페인)이 고향 마요르카 섬에 세운 교육센터입니다. 테니스 교습뿐 아니라 일반 교과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7천여 평 부지에 학습 교실, 테니스코트, 수영장, 기숙사, 진료소, 스포츠카페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아카데미의 주인 나달 역시 코로나 방역과 치료를 위한 모금운동에 앞장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나달 테니스 아카데미 앞에 함께 선 페더러(왼쪽)와 나달

스포츠 무대 뒤에서 보게 된 챔피언들의 또 다른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때로 실망하고 때로 분노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곳이라는 희망도 갖게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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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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