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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항거, 이유 있다

2020.08.12

가. 왜 의사들이 거리로 나올까.

정부의 의대생 증원 정책에 맞서 전국 의사들이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가 앞장서서 오는 8월 14일 전국적 규모의 광장 집회에 나선다고 한다. 그 와중에 8월 7일에는 응급실, 집중치료실(ICU), 수술실 근무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에 첫발을 디뎠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그러한 행동에 동의하기보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의사는 환자 곁을 지켜야 한다며 반대해왔다. 그런데도 후배 의사들이 수술실이나 응급실만큼은 끝까지 지켜주는 모습에서 의사로서 ‘책무의 끈’만은 놓지 않은 듯해 애틋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마음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실로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의사들이 응급실과 수술실을 걷어차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전문의 수련 과정의 젊은 의사들이 그 ‘성역’을 버리고 과감하게 거리로 나왔다. 젊은 후배 의사들이 여당과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정책에 크게 공분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료 행위는 사회복지 개념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정부 기관과 의사 집단 간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보건복지부가 ‘갑의 갑’ 행세를 하며 의료계를 ‘을의 을’로 몰아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국내 의료계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해 의식에 울분이 쌓일 만하다.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고 실망은 커져만 갔다.

필자가 이렇게 국내 의료계의 ‘과거 이야기’를 장황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 특히 작금의 당정 협의체가 ‘의사협회의 장외 투쟁’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번 사태를 이른바 의료계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인식해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접근 방식엔 이제 신물만 날 뿐이다.

국내 의사의 수를 현재보다 월등히 증원하겠다는 그룹은 언제나 OECD 통계 자료를 인용하며 그 타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 통계 수치에는 ‘한의사의 수’가 완전히 빠져 있다. 마치 국내에서 ‘한의사’가 진료 행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2019년 자료에 따르면 대한의사협회에 등재된 의사는 11만 3,500명이고, 2018년 대한한의사회에는 2만 5,000명의 한의사가 등재되어 있다. 요컨대 한의사가 국내 전체 의료 인력의 거의 20%에 달한다. 그만큼 한의사의 역할이 분명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내 의사 수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한의사 수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OECD 통계 수치도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정책 입안자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대처를 탓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게 아니라면 정책 입안자는 한의사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국가 (의료) 정책은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앞으로 필요한 의사 수를 예측해 수급을 조절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인구 감소 현상에 따른 제반 문제를 함께 고려해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선심 쓰듯 의과대학의 신입생 정원을 ‘왕창’ 늘리겠다고 선언해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교육 행정부가 보이지 않는다.

의과대학 증설 문제는 보건복지부 소관이라기보다 교육부 소관의 몫이 더 크다. 의사 교육과정은 분명 교육부가 챙겨야 할 책무다. 의과대학에 투입해야 할 재정적 예산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는 게 한 가지 이유다. 의과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해본 필자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의과대학 설립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자금과 주도면밀한 계획 및 노력이 필요하다. 장밋빛 청사진만으로 섣불리 덤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의과대학이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 중에는 연구·교육 및 해당 지역에 대한 봉사 목적의 대학병원 운영이 포함된다. 그리고 대학병원은 해당 지역의 인구 및 환자의 수요 예상치를 면밀하게 고려해 계획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병원 운영은 설립 인가를 받으려는 의과대학에는 좋은 약(藥)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무서운 독(毒)이 될 수도 있다.

1988년 정부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강원도 강릉시 소재 명지대학교 의과대학과 부속 대학병원은 운영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재단 주인’이 바뀌는 고난을 겪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던 서남대학교 의과대학은 심각한 시설 미비와 교수진 미확보 문제로 교육부로부터 국내 대학교 역사상 초유의 폐교(閉校) 행정 처분을 받았다.

의과대학은 의학 관련 해부학·생리학·생화학·약리학 등 10여 개 기초 의학 과목 교실(敎室, Department), 내과부(심장내과, 소화기내과, 신경과 등)와 외과부(심혈관외과, 소화기외과, 신경외과 등)를 비롯한 40여 개 임상과에 소속된 교수진·연구진 및 간호 요원 등 인력의 수급과 운영 면에서 여타 단과 대학과는 너무도 다른 생태적 차이가 있다. 물리적 구조와 인적 구성이 거의 대학교 하나를 설립하는 것에 버금가는 ‘거대 프로젝트’인 것이다.

국내 한 중견 대학교의 임용 교수 수치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0년 자료). 그 대학교의 인문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약학대학 등에 등재된 교수는 총 397명인 데 반해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그리고 치과병원에 소속된 교수가 무려 375명이다. (연구교수, 연구원, 도서정보센터를 비롯한 여러 부속 기관에서 속하는 일반직 종사자는 제외한 수치다) 이처럼 교수 수치만으로도 의과대학의 ‘덩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의대 증설 문제에는 교육부가 반드시 참여해 꼼꼼히 챙겨야 할 사항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번에 거론된 ‘공중보건 정책 의과대학’은 어떤 인문사회 계열의 교육기관이 아니다. 앞으로 공중보건 정책에 무게를 둔 의과대학 졸업생이라도 일차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면, 그에 걸맞은 의과대학이 갖추어야 할 교육 시설 투자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폐교 조치한 서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말이다.

다. 정책 협의체 구성이 절실하다.

근래 현안으로 떠오른 의사 증원 문제를 비롯해 ‘공중보건 정책 의과대학’ 신설 문제 등은 당정 협의체가 대한의사협회,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 등 전문 기관과 충분한 논의를 거쳐 진행해야 한다. 모든 당사자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결코, 시간에, 선거공약에 쫓겨 일방적으로 추진할 일이 아니다. 서둘지 말자는 얘기다. 이제 의사들이 항거하는 이유를 경청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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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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